만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기로 돌아가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해보는 적이 있다. 물론 대답은 ‘과거 어느 때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해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이 크게 개선된 시대를 2,000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시기가 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라 불리는 ‘아름다운 시대’(혹은 ‘좋았던 시절’)가 그 때다. 벨 에포크는 1870년경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문화가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번영했던 이 시기에 에펠탑이 지어졌고, 센 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건설됐으며, 몽마르트르와 물랭 루즈가 생겨났다. 또 과학과 기술의 도약적인 발전으로 영화, 전화, 자전거,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의 획기적인 교통 통신수단들이 이 시대에 발명됐고, 파리 중심가에는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가 등장해 번쩍거리는 쇼윈도에 고급 패션을 진열하며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세 이후 거의 변하지 않고 정체된 삶의 환경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처럼 갑작스런 변화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진보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새로 건설된 파리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화려한 불빛 아래 오락과 소비를 즐기기 시작했고, 들뜨고 분주한 생활 속에서 처음으로 불안, 소외, 공허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정서가 싹튼 시기다.
그 경이와 혼란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낸 예술가들이 문학에서는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 에밀 졸라, 프루스트… 미술에서는 고흐, 고갱, 드가, 마네, 르누아르, 로트렉, 세잔, 로댕…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또 파리와 함께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던 세기말 비엔나에서는 현대 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아돌프 로스와 오토 바그너,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분리파’를 창시한 클림트와 에곤 실레, 작곡가 말러와 쇤베르크가 각각 전통의 질서를 파괴하며 새 시대를 열고 있었다.
2011년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는 미국인 작가가 한 밤중 파리 뒷골목에 나타난 마차를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역사 속 예술가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판타지를 그린 코미디다. 처음에는 1920년대로 넘어가 장 콕토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콜 포터의 노래를 들으며 헤밍웨이와 함께 술을 마시고 피츠제럴드, T.S. 엘리엇,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달리, 마티스를 만난 그는 과거 속에서 또 한 번 마차를 타고 벨 에포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로트렉, 드가, 고갱까지 만나게 된다. 예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상만 해도 황홀해지는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었으니,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무릎을 치며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100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벨 에포크 시대의 풍경과 인물, 그 탐미적인 분위기를 일별할 수 있는 전시가 지금 남가주 뮤지엄 두군데서 열리고 있다. 패사디나의 노턴 사이먼 뮤지엄에서 이달 초 시작된 ‘낮이나 밤이나: 벨 에포크의 파리’(By Day & by Night: Paris in the Belle Epoque)는 툴루즈 로트렉과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의 작품을 중심으로 피카소, 드가, 쇠라 등 18명의 작품을 통해 당시 파리의 일상과 거리, 카페, 사람들, 극장포스터 등을 보여준다.
그보다 한층 더 흥미로운 전시는 게티 센터에서 내년 1월까지 열리고 있는 ‘마네와 모던 뷰티’(Manet and Modern Beauty) 전이다. 인상주의와 현대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의 후기작품 90여점을 모은 기획전으로, 마네 작품전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점에서 놓치면 손해인 전시다. 특히 마네는 초기의 문제작들(‘올랭피아’ ‘풀밭위의 식사’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 워낙 유명해서 한결 부드러워진 후기 작품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데, 이 전시는 51세로 죽은 그가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린 초상화와 정물, 파스텔과 수채화를 보여주는 최초의 기획전이라는 점 또한 색다르다.
마네의 후기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심한 아름다움이다. 대상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터치, 과감하게 생략한 배경, 원근법에 신경 쓰지 않는 평면성 때문에 오히려 인물의 내재성이 더욱 부각되는 초상화 20여점이 매혹적이다.
한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는 이렇다. ‘사람들은 현재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해서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소리다.
<
정숙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1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이곳 저곳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있지만 돌아갔다 다시 오질 못한다면 지금 이대로 그냥있기로 했지요, 또다시 그 어려웟든 일들을 기억조차 하고싶지않은게 여기저기에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