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난 자리에 가을빛 닮은 국화꽃이 소박한 꽃잎을 열었다. 메인 스트릿의 작은 상가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할로윈 장식을 내걸었고 크고 작은 호박이 출입구 앞에 나와 앉아 손님을 맞는다. 마침내 ‘가을이 왔다’라고 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가게 되는 초등학교의 돌담 너머로 키만큼 자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해질녘 학교 운동장은 오늘도 텅 비어 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공을 차던 커다란 운동장에는 개구쟁이 소년이 세월을 건너와 뛰어 다닌다. 고장 난 시계의 태엽이 천천히 풀리듯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맴도는 순간이다.
그 학교를 지나 골목을 벗어나면 맞은편 쪽으로 스쿨버스만한 작은 집이 있다. 언젠가 젊은 부부가 함께 앞뜰을 가꾸는 것을 본 이후 그 집은 부부가 결혼 후 처음 장만한 집일 거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은 집 차고 앞에 목재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궁금했으나 그 앞을 지나치는 찰나의 시간에 곁눈질로 그 작은 집을 관찰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작은 변화를 발견했다. 목재로 가려져 있던 드라이브웨이가 조금씩 드러나고 토막 난 목재가 반대편에 쌓여갔다.
그렇다고 작은 집의 외벽이 눈에 띄게 변하거나 내부공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내와 외출에서 돌아오던 길에 그 집 앞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그 집이 화제에 올랐다. 목재의 용도를 모르겠다는 내 말에 아내는 그 집 젊은 남편이 뒤뜰에 데크를 만들고 있다고 답해 주었다. 아마 아내도 나처럼 그동안 그 작은 집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비록 솜씨 좋은 목수의 손길은 아닐지라도 젊은 남편의 거친 못질로 완성된 데크 위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리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어쩌면 그들을 보며 우리의 가난한 신혼시절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젊은 부부의 여름은 작은 집 데크에 땀과 웃음으로 온전히 남겨져 기억될 것이라 믿는다.
뉴욕 주에서 시작된 주내 거주자에 대한 공원 무료개방이 내가 사는 코네티컷에도 시행되어 주 번호판을 단 차량이나 주민에게는 주립공원이 무료로 개방되었다.
뉴욕과 달리 이곳의 대부분 지역이 한쪽은 산 다른 한쪽은 바다에 접해 있어 늘 생활 속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는데도 무료라는 치명적인 유혹에 주말마다 공원을 찾아 나섰다.
인적이 드물어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고즈넉한 휴양지가 되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듯한 홀가분한 마음이 되곤 했다. 산에서 내려온 바람은 가슴에 담았고, 바다에서 본 노을은 기억에 묻어두었다.
여름이 물러간 자리는 더 없이 한적했다. 책 읽기가 무료하면 바다를 따라 걷고, 조개 무덤 앞에 쪼그리고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다. 사진기를 세워 놓고 일몰의 순간을 기다리다 깜빡 졸기도 했다. 나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파도를 쫓아가며 뛰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이어졌고, 자전거를 탄 청춘남녀는 보폭을 맞추듯 나란히 달려오고 다시 달려가 사라졌다.
어쩌면 계절은 가고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갔다고 여겼던 여름 또한 조금 비켜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흔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진다고 해도 내가 살아있는 한은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기억이었다. 시간은 서 있으나 가고 있었고, 가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들과 나는 날마다 만나고 있는 것이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머물던 시선을 잠시 거두었을 뿐이었다.
어린 두 자매가 하루 종일 쌓았던 모래성을 남긴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아이들이 남기고 간 모래성을 사진에 담아두기로 했다. 이제 그 사진 속 모래성에는 여름과 가을의 햇빛이, 소녀의 작은 몸에서 쏟아져 나오던 웃음이 바닷가의 기억과 오래오래 살게 될 것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긴 꼬리를 단 연이 춤을 춘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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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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