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여름이라 불러 보지도 못한 채 여름 끝자락에 서 있음을 느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가 끝내는 떠밀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순환 앞에 무력해지면서도 내심 안도한다. 여름은 뜨겁게 넉넉했었고,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나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던 곳을 아직 못가고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탱글우드로 향했다. 고속도로 대신 좁은 국도를 따라 산길로 들어서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집들의 허물어진 뒷마당에서 그만그만한 크기의 절망과 낙담을 보고, 소박하게 꾸며 놓은 앞뜰의 작은 꽃밭에서 그들이 포기하지 못한 희망을 짐작한다. 삶이 나한테만 가혹하지 않았음을 느끼며 새삼 위로를 받는다.
작은 마을을 지나니 계곡을 따라 1차선 도로가 이어졌고, 그 좁은 길옆으로 강이 따라 흘렀다.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산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무성하던 나뭇잎이 비록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의 당당함이 보였다. 계곡이 끝나는 곳에는 크지 않은 호수가 있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사내가 호수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섬처럼 떠 있었다. 호수 가까이 차를 세우고 보니 투망을 던지고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하는 사내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호수 바닥에서 끌어 올리는 반짝이는 여름을 보았다.
해마다 보스턴 심포니의 여름 공연이 펼쳐지는 탱글우드 주변의 작은 마을은 이미 축제가 시작되어 있었다. 꼬리를 문 자동차 행렬은 이미 끝이 보이지 않았고 거리의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악회가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았는데도 산 중턱까지 가득 메운 주차된 차량을 보니 마음이 바빠졌다. 경찰의 수신호를 따라 정해진 자리에 차를 세우고 보니 공연장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손 가득 의자와 아이스박스 등을 들고 공연장을 향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여기에 오길 정말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우리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라솔을 가져 왔더라면 좋았겠지만 햇빛이 뜨겁지 않으니 한 뼘 그늘도 충분했다. 준비해온 음식을 꺼내고 의자를 펴고 아내와 나란히 앉으니 최고의 객석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옆에 앉은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었고, 바게트 빵에 치즈와 햄을 얹어 즉석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마주보고 웃었다. 하얀 포도주는 달콤했고 부딪치는 와인 잔 소리는 맑은 하늘을 닮아 있었다.
마침내 음악회가 시작되었고, 바람을 타고 오는 선율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채우고 흩어졌다. 노인은 두터운 돋보기를 꺼내어 책을 읽었고, 7살이 채 되지 않은 듯한 어린 소녀는 턱을 괴고 엎드려 바람을 따라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도 어느 누구도 그가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은 매미가 울음소리를 내며 존재를 알렸는데 곧 여름이 떠날 거라는 알람소리처럼 들렸다. 잠시 구름이 빠르게 모이는가 싶더니 여우비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빗 소리도 음악의 일부가 되었다. 옆 사람이 펼쳐 놓은 파라솔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떠올렸다.
연주자와 관객 사이로 비가 지나가고 거짓말처럼 파랗게 갠 하늘로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울려 퍼졌다. 조용하던 객석에서 사람들이 어깨를 들썩였고, 일군의 무리가 조용히 일어났다. 나이든 신사가 허리를 굽혀 자신의 부인에게 춤추기를 청했고 할머니가 소녀처럼 웃었다. 다른 중년부부가 음악에 맞춰 능숙하게 춤을 추었다. 노인이 금방 잠에서 깬 손녀에게 춤을 청하며 허리를 굽히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은 손녀의 얼굴이 해맑게 빛났다.
젊은 아빠도 어린 딸을 목에 태우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고,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가 빙글빙글 돌며 어른들 흉내를 냈다. 소리 없는 조용한 움직임이 춤이 되고, 구경하는 이들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가끔은 삶이라는 게 부질없는 축적 같다가도 이런 시간이 있어 견디고 건너가는 거라 믿고 싶다. 여름을 낚던 호수의 남자가 생각났다. 그가 원하는 여름이 투망에 가득 담겨 있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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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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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광경입니다. 헤르만 헷세의 글을 읽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