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칼럼을 쓰다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음악감상을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느냐’는 거다.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음악에 대한 지식이 많으니 당연히 알고 있으려니 하고 물어오는 질문이겠지만 사실 그것만큼 대답하기 힘든 질문도 없다. “그때 그때 다르고, 사람마다 달라요”하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성의없는 대답인 것 같아 대충 어물거리고 말지만 사실 그 어떤 것도 정답일리는 없다. 음악이 싫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가까이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취미생활로 이끌 수 있는 ‘음악감상의 최단기 왕도의 길’ 과연 그런 것 있을까? 만약 있다면 나도 그것이 알고 싶다. 또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전공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음악을 그렇게 많이 알 수 있느냐’는 거다. 나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 마다 “네 저도 지구상에 ‘음악 감상과’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한다. 사실 음악이라는 것도 전공하면 할 수록, 아무리 많이 알아도 포괄적인 음악이라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지식이라는 것은 지엽적일 뿐이다. 마치 의학 안에 내과, 외과, 신경외과 등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만약 음악을 전공해서 신경외과 부분만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아마 듣는 상대방들은 무척 지루했을 것이다. 다행히(?) 전공분야가 없었던 것이 오히려 칼럼에는 도움이 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자랑은 아니기에 대화는 늘 서먹해지기 마련이다. 또 하나의 질문이 ‘책은 언제 낼거냐?’는 거다. 그때마다 “언젠가는 내겠지요”하고 대답하곤하지만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내년이 될 수도 있겠고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왜 나는 책내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솔직한 심정이 ‘음악 칼럼’에 대한 반응을 별로 기대하지 않지 때문이다.
음악 칼럼을 처음 쓰기로 결심했을 때 그 기대감은 반반이었다. 과연 사람들이 이런 칼럼을 좋아할까? 아마 제목만 보고 거들떠 보지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일거야. 이런 심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 읽을 거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명곡을 찾아서’ 란 해설들이 주로 딱딱하고 설명 위주에다가 구체적인 (언어적)수식 없이 주입식 설명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명곡을 들을 시간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명곡을 찾아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혹 관심이 있다하더라도 음악이라는 것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추상적일 뿐더러 그 피상적이 모습이 사람들의 의식의 표면을 깨트리고 마음 속으로 침투하기에는 너무나 단조롭고 우아하다. 즉 음악해설에는 사람의 의식을 분열시키고 또 무언가를 집중하게 만드는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도 그것으로 연민과 감상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 즉 동기를 주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글도 빵점이다. 음악은 당연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이쯤 되면 아무리 설명이 아름답고 토가 좋아도 글은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무방비 융단폭격이다.
그러면 어떻게 음악 칼럼을 시작하게 됐을까? 첫 칼럼의 제목이 ‘비창과 동성연애’였다. 사람들은 이 제목을 보고 아마 차이코프스키의 숨겨진 이야기를 예상했겠지만 사실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샌프란시스코의 동성애)의 분위기와 이곳에서의 차이코프스키의 인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나만의 이야기라고나할까, 내가 사는 동네 이야기를 하면서 차이코프스키의 숨겨진 얘기를 곁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는… 즉 나름대로 잔재주를 부린 것이었다.
최근들어 음악칼럼들이 자주 등장하고 책도 많이 출판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좋은 현상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여유있어지고 음악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만큼 살기 좋아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면 공연의 활발함에 비해 비평이나 칼럼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열악한 수준이다. 얼마 전 한국의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낸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를 조금 들여다 봤는데 좋은 글 솜씨, 풍부한 음악지식에도 불구하고 과연 책이 얼마나 팔렸을까 의문이다. 음악과 문학의 클로스 오버… 아주 좋은 착상, 어울리는 한 쌍같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글쎄요’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음악은 아름답지만 들려주는 예술이지 표기하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음악과 가장 빠르고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표기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음악에서의 아름다움보다는 무소륵스키의 작품같은 데서 죽음 등의 묘사가 문학보다도 아름답게 승화된 모습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음악은 아름답지만 또 생각보다는 아름답지만은 않다는데 그 숨겨진 아름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음악도 역시 파괴적이고 악마적이고 죽음같은 인간의 모든 모습들이 들어있다. 종교적 회개의 눈물이 그러하듯 시나 언어로는 대신할 수 없는 어떤 치유의 요소를 글로 쓴다? 참 먼 이야기다. 그러나 감동이라는 것은 어쩌면 뻔한 얘기보다는 숨겨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쓰여질 수 없는 음악 이야기… 그 미완성에 대한 영원하고도 씁쓸한 목마름은 아니었을까?
<이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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