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는 선의 예술이다. 기법도 중요하지만 정신수련이 포함되기 때문에 서도라고도 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그린다고 해서 심화라고도 한다. 붓을 들어 먹을 찍고 종이에 내리그을 때 붓놀림의 강약과 속도, 점 선 획의 굵기, 먹의 묽기, 문자의 비례와 균형 등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독특한 서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예는 쓰는 이의 성격과 인품을 나타내는 거울로 여겨져 왔다. 특히 왕의 서예는 그의 통치기질을 드러내는 얼굴과도 같아서 모든 이의 주목을 받았다. 왕들의 서예 실력이 뛰어난 이유다.
역대 대통령들도 서예 휘호를 통해 자신의 정치사상을 압축시켜 예술적으로 표현하곤 했다.(트위터나 날리는 대통령과는 격이 달랐다)
조선 왕조 가운데는 선조가, 대통령 중에서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최고의 명필가로 꼽힌다. 놀라운 것은 이 둘을 비교했을 때 이승만의 글씨가 한수 위라는 서예전문가들의 평가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에서 석사, 프린스턴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최고의 서예가 중 하나라니,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지만 이승만은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서예를 익혔고, 독립운동으로 옥살이하던 시기에 열심히 서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혼자 있는 여가에 붓글씨를 연습했다. 훌륭한 학자의 요건으로서 서예가를 만들려했던 부모님에 대한 의무감에서 시작한 것이다. 간수들의 회의로 붓과 잉크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서예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결국 손가락 셋이 굳어져 내 손은 불구화되었다.”
한석봉 이후 최고의 명필가로 꼽히는 김정희(1786~1856)도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 유명한 추사체를 만들었다.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통산 13년의 곤궁한 유배생활 내내 글과 작품을 썼고, 풀려난 후에도 서화와 선학에 몰두하면서 죽기 전날까지 집필했다고 한다. 최고라 꼽히는 서예가들의 이면에는 이처럼 무서운 장인적 수련이 숨어있다.
이승만의 휘호와 김정희의 글씨를 지금 LA 카운티 미술관(LACMA)의 한국서예전(Beyond Line: The Art of Korean Writing)에서 직접 볼 수 있다. 이승만이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精進再建(정진재건: 힘써 나아가서 다시 일으키자는 뜻)’은 한눈에 보아도 거침없고 활달하며 수려하다. 냉철하고 굳세면서도 부드럽고, 자신감 넘치며 용기 있는 성격을 보여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김정희의 글씨 8점은 따로 전시실이 만들어져있어서 그 독특한 추사체를 가까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곤륜기상’(곤륜산에서 코끼리 타기)은 상(象)자 대신 코끼리 모양의 한자 원형을 그려넣어 현대서예나 추상화를 방불케 한다. 획을 길게 늘여 쓴 ‘자신불’ 역시 파격적이다. 또 한자 서예로만 알려진 김정희가 아내와 며느리에게 한글로 쓴 편지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씨는 신사임당의 유묵이다. 중국시인 이백의 시를 초서로 쓴 이 서예는 얼마나 기품있고 우아하고 예술적인지, 한번 보고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고귀함을 품어낸다. 글씨가 아니라 ‘붓이 춤을 추고 지나간 자리’라고 해도 좋을 최고의 작품이다.
한국서예전은 중국서예 전문가인 스티븐 리틀 라크마 부장(중국한국동남아미술부)이 4년 공들이고 정성을 쏟은 기획전이다. 한국에서도 한자리에서 감상하기 어려운 국보급 작품 100여점을 전국 주요 박물관들과 개인 소장가를 망라하여 공수해왔다. 신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서예 2,000년을 아우르며 왕족, 학자, 승려, 서예가, 심지어 노비가 쓴 글도 볼 수 있다.
예술적인 미감으로 보자면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만나는 현대서예가 훨씬 압도적이다. 서세옥의 ‘사람’을 비롯해 이강소, 이웅노, 김순욱, 김종원, 안상수, 윤광조, 정도준 등의 작품은 하나하나 철학적이고 명상적이며 특별한 울림을 준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서 작품이 나온 하농 김순욱 선생의 ‘무’(Emptiness)와 그가 새긴 전각 도장이 마음을 끈다. 고 김순욱 선생은 미국에서 현대서예를 창안하다시피 한 분이고, 서예의 세계화를 위해 ‘아트 오브 잉크 인 아메리카’를 창설하여 각국의 서예가들과 수차례 그룹전을 열며 소통했던 분이다. 전시회를 열 때마다 신문사를 방문해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인터뷰하시던 생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서예전은 9월29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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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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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3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조용하게 서체를 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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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봐야겠네요.
대한의 아들 딸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곤 하지요, 정 숙희님의 좋은 글에 초치는 모양새가 될수는 있지만 문득 떠오르는 하마디, 각 개인은 어딜가도 에서도 정말 잘하고 잘 살고 능력이 특출한데 두 사람만 모이면 의견이 다르면 맘에안들면 말 투 에서부터 얼굴에 나타내고 결국엔 입에 거품까지 내며 .....내 의견만 의견이 아니고 다른이의 의견도 들어 배우고 익혀 내 속 맘의 수련 삶의 지혜로 삼으려는 그 자세가 아쉬운 우리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