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가까이 카이로에서 이집트 젊은이들에게 K팝을 가르쳤던 보컬 트레이너 박영민은 지난달 3주 일정으로 LA에 왔다. 오는 길에 서울에 잠깐 들러 좀 두꺼운 옷을 가져왔지만, 요즘 LA의 체감온도는 카이로와 별 차이가 없어 괜한 걸음이 됐다. 그룹 ‘블루지오’의 멤버로 음반도 낸 가수 지킹도 같은 일정으로 LA에 왔다. 이들은 지금 할리웃에서 진행되고 있는 K팝 아카데미의 보컬 강사들이다.
한국 문화체육부의 해외문화홍보원은 올해로 4년째 세계 26개국에서 무료 K팝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LA 한국문화원이 진행하는 LA 클래스에는 지원자가 정원의 2배 이상 몰려 수강생 120명을 뽑는데 예심을 거쳐야 했다. 특히 K팝을 직접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팬들은 원조 한류의 나라에서 선생님들이 와서 가르치는 이 연중행사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하루 3시간씩, 3주 일정인 LA K팝의 댄스 강사는 예니엘과 고영원. 20대 중반의 젊은이들로 지금 이곳 청소년들과 어울려 비지땀을 쏟고 있다. 한국의 한류는 고용창출이 만만찮은 거대 산업으로 성장해 이번에 LA에 온 4명의 K팝 강사들은 모두 다양한 분야의 한류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가 주를 이루는 미국 수강생들의 특징은 특유의 활달함과 솔직함. 강사들은 특히 이들의 열정과 K팝 지식에 놀라고 있다.
“열정이 예상을 뛰어 넘어요. 3시간 강의가 끝난 뒤에도 따로 남아 연습하기도 하고, 아이돌 그룹은 곡마다 안무가 다 다른데, 수십 곡의 댄스를 다 아는 학생도 있어요.”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만나는 김건모, 신승훈, 조관우, 조성모 등의 노래도 술술 나와 강사들이 오히려 깜짝 놀란다. 드라마 주제가나 OST 등을 통해 K팝의 영역이 넓어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흔히 한 나라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문화라고 한다. 문화가 따르지 못하는 과한 경제력은 때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문화를 이야기할 때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나누는 이분법은 요즘 같은 시대에도 유효한 것일까.
K팝 강사들이 전하는 공통된 이야기는 외국인 학생들이 의외로 한국어를 잘 알아듣고, 무엇보다 한국어 발음이 정확해서 놀랍다는 것이다. 통역이 있긴 하지만 걱정했던 소통의 문제는 크게 없다고 한다. 한국어 노래가사나 드라마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할리웃의 한 여배우는 BTS의 랩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언어를 알면 문학이라는 고급문화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말을 알아야 그 나라의 깊은 정신에 가 닿을 수 있게 되는데, 대중문화인 K팝이 그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LA 한국문화원의 한국어 반에 매 학기 100명이상 몰리는 등 한국어 수강 열기가 높은 것은 한국 드라마와 한국 노래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한국 드라마처럼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드라마가 또 있을까. 늦은 저녁 출출한 시간, 드라마 앞에 앉았다간 괜히 고문당한다는 기분이 없지 않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K 푸드는 확산된다. 떡볶이라든지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음식을 타운 식당에서 찾는 타인종 고객 중에는 드라마를 본 경우가 적지 않다.
이슬람권 젊은이들을 가르쳤던 박영민이 놀란 건 그들의 패션. “히잡만 썼을 뿐 옷차림은 서울의 젊은이들과 똑 같았다”고 한다. 패션이 이렇다면 관심이 한국 화장품인 K뷰티와 의류제품, 액세서리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언젠가 ‘동대문 표 패션’이 뜰 수 있고, 한류 스타들이 수천 달러를 호가하는 명품 대신 한국산 핸드백도 좀 메어주고 한다면 한국 제조업체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번 주 일정을 마치고 곧 한국으로 돌아갈 이들 K팝 아카데미의 젊은 강사들은 한국 발 문화 전파에 볍씨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류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어깨에 배어 내려오는 흥과 즐거움을 나누는 문화가 아니던가. 증오에 찬 10대 후반, 20대 초의 젊은이들이 수십 명의 무고한 생명을 떼죽음으로 몰고 가는 참극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는 이 때, 한국 젊은이들이 흘리고 가는 땀이 또래 젊은이들을 외톨이 골방에서 광장으로 불러내고, 증오 대신 기쁨과 즐거움의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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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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