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불볕더위가 이어지더니 하루가 다르게 매미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라고, 시인 안도현이 노래했었다. 그러나 17년의 세월을 땅 속에서 보내고, 다시 땅에 올라와 찰나의 시간을 보내는 매미의 일생을 알고부터는 여름은 매미와 함께 천천히 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가 한국에 갔다. 아내는 떠나기 전날의 늦은 밤까지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짧은 일정의 여행이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나를 홀로 남겨 놓는 것이 불안했을 것이었다. 육개장, 갈비탕, 미역국, 시금치국, 북어국 등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국들이 만들어졌고, 하루 먹을 양 만큼으로 나뉘어 냉장고와 냉동실에 채워졌다. 냉장고 아래 칸에는 각종 밑반찬들을 네모난 용기에 담아 블록처럼 쌓아 놓았다.
며칠 사이 냉장고의 내용물은 아내의 일정에 따라 하루로, 다시 일주일로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줄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먼저 먹어야 할 것과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것을 분류해 두었고, 그래도 미덥지 않은지 이 모든 것들을 마치 시골 음식점의 메뉴판처럼 손 글씨로 써서 냉장고 겉 문에 친절하게 붙여 놓고서야 안심했다. 짧은 여행조차 홀가분하게 떠나지 못하고 수고한 아내에게 미안하고, 그 마음 씀이 고마웠다.
아내가 써 놓은 순서대로 음식을 꺼내 놓기만 해도 나의 저녁 식탁은 훌륭한 만찬이 될 것이었다. 이번에는 혼자서도 잘 지내보리라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아내가 없는 집은 썰렁한 분위기로 나를 압도했고, 입맛도 의욕도 삼켜 버렸다. 작은 그릇에 먹을 만큼의 된장국을 덜어내 데우고 냉장고 맨 앞에 놓여있던 밑반찬 한가지를 그릇 채 꺼내 놓고 며칠을 먹었다. 겨우 허기를 메우고, 거실에서 멍하게 TV를 보고,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집은 필요 없이 컸고, 너무 조용했다. TV채널을 다투던 아내가 없으니 리모콘을 손에 쥐고도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 내용도 모르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소음이 메아리처럼 집 안을 맴돌 뿐이었다. 그래도 적막함보다는 그 소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아내가 애써 준비한 음식들은 냉장고에서 화석처럼 굳어갔다.
저녁마다 두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해서 아내 대신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안심을 시키느라 자못 자신있게 잘 지내고 있다고 큰 소리로 말했지만 아마 아이들도 주변머리 없는 아빠의 저녁 식탁 풍경을 짐작했을 것이었다.
주말에는 뉴욕에 있는 큰 아이가 함께 식사를 하자며 맨해튼으로 불러내 주었다. 아이가 예약해 둔 식당에서 아이가 시켜준 음식을 먹었고, 와인 한병을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 우리는 친구처럼 마주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미국정치로 화제가 옮겨가자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법을 공부하고 관련된 직업을 가진 아이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념은 더 확실하고 견고해져 있었다.
기차역으로 가는 30여분의 길을 아이가 함께 걸었고, 주말마다 세탁을 해야 하고,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마켓에 가야 한다는 아이의 일상을, 아내를 통하지 않고도 알게 되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 나이 든 아비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앞장서는 아이가 참 듬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잠시 졸았다. 검표를 하는 승무원의 기척에 깜짝 놀라 밖을 보니 겨우 한 정거장을 지나왔을 뿐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긴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긴 여행에서 돌아와도 제자리에서 한 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인생이란 오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담 너머로 내일을 보는 것이었다.
건너편 좌석에 한 중년 여인이 고개를 떨군 채 졸다 깨기를 반복한다. 그녀의 운동화는 낡아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짊어진 오늘이 무거웠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 맞은편에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때론 미소 짓고, 다시 바쁘게 문자를 만들어 보내는 젊은 청년이 앉아 있다. 손을 맞잡고 서로 기대어 잠들어 있는 젊은 연인, 신문을 펼쳐 든 내 나이 또래의 남자, 엄마 무릎을 베고 잠든 아이, 서로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굴절된 나를 만나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어느덧 태양이 정점을 찍고 내려가고, 느린 걸음으로 왔던 더위도 빠르게 물러나고 있었다. 이제라도 하루라는 프레임에 가둬둔 일상에서 벗어나 봐야겠다. 아직은 나를 향해 쏟아지는 햇빛과 마음에 담아 둔 장미꽃이 궁금하다. 아내가 보냈다는, 도착하지 않은 편지가 궁금한 어느 여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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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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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