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건너 비가 내리는 우울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숲은 깊어졌고, 그늘은 짙어져 갔다. 일이 많으면 너무 많아서, 일이 없으며 또 너무 없어서 상가의 사람들은 지쳐 있었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마저 잊은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세월에 단련된 너그러움을 나누었다.
작은 아이가 의과대학을 졸업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웃집 할머니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오래된 이웃이었으나 평소에 친밀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우리로서는 의외의 방문으로 여겨졌다. 그녀가 의사였으며, 그래서 힘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아이를 더 축하해 주고 싶었다는 귀한 마음이 온전히 느껴졌다.
졸업식은 노천극장에서 열렸다. 오락가락 하던 날씨는 그날도 예외 없이 심술을 부렸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고 지나가는 바람 끝에 풀냄새가 실려 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구름 뒤에 숨어있던 햇님이 졸업식이 열리는 동안은 얼굴을 드러내며 축하해 주었다.
전통 복장을 한 백파이프 연주자들이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며 중앙 계단을 따라 연단 앞으로 행진하며 성대한 졸업식의 시작을 알렸다. 교수들이 입장했고, 묵직한 자주색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이 그 뒤를 따라 줄지어 들어왔다. 천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이들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고, 허공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어떤 가족은 큰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고, 어떤 이는 준비해 온 호각을 기운껏 불어댔다. 그동안 아이들의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식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광경으로 졸업식이기보다는 축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힘든 여정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었고, 그동안 자신을 믿어준 가족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 많은 졸업생중에서도 내 아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멀리 있는 아이가 들리도록 우리도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축하해 주었고, 아이가 무리 속에서 손을 흔들어 답했다. 어린 시절부터의 꿈을 위해 아이 스스로 지켜내야 했던 숱한 역경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고, 그것을 이겨낸 아이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졸업생 한 사람씩 이름이 불리고, 단상으로 올라간 그 한 사람을 위해 수천의 관중이 한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졸업생의 가족 중에 MD 학위가 있는 이들은 가족들이 단상에 함께 올라가 가운을 입혀 주었다. 어떤 이는 부모가, 어떤 이는 형제가 가운을 건네주는 것을 보는 순간, 비록 내 아이는 아니어도 건네주는 이의 자랑스러움과 받는 이의 감사함이 연단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그렇게 마지막 학생에게 학위가 주어졌고 졸업식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회자가 연단 앞에 다시 서고, 의사가 되어 군에 입대하게 된 두 졸업생을 소개했다. 제복을 입은 두 졸업생이 씩씩하게 단상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 때였다. 수천의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박수는 크게, 오랫동안 이어졌다. 관중들은 두 젊은 남녀 졸업생을 위해 한 목소리로 국가를 제창했다. 졸업생 모두가 따라 불렀고, 몸이 불편한 노인도 엉거주춤 일어선 채 경의를 표했다. 마치 어느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어렵게 학위를 얻었는데 군 입대를 택한 그들의 고민은 알 수 없으나 특별했고, 그런 그들을 대하는 관중들의 태도는 감동적이었다.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했으니 위급할 때에는 국가가 당연히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참된 명예는 스스로를 버렸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졸업식이라기보다는 축제였고, 축제였지만 수천의 관중이 일어나 스스로 군복무를 택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격식을 갖춘 장엄한 예식이 되었다. 병든 이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사명과 윤리의식을 강조하던 학교가 졸업생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미션이었으며, 졸업생을 사랑하는 학교와 학부모의 진심어린 당부의 말이기도 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국가를 함께 부른 이후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서로가 제 가족의 피켓만을 들던 우리가 두 젊은이로 인하여 같은 공동체임을 느끼고, 그 공동체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됨을 확인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인종과 빈부의 구별이 없었다. 모두 함께 어울려 축제를 즐기고 가족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어서 사진을 찍었다. 웃음 소리가 노천극장의 양철 지붕을 울렸고,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참석한 모든 이는 행복했고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젊은이들의 기상과 꿈이 같은 하늘 아래 광활하게 열린 날, 그들이 있어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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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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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카 추카 먼저 축하드리며, 사회의 일원으로 차별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성심성의껏 의무를 다할때 존경을 경제력 자립을 사는 재미를 이웃으로 부터 동료로부터 흠뿍 받을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