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에 없던 휴가였다. 오래 전 한 리조트의 멤버십을 계약하며 덤으로 얻은 프리 패키지가 1장 남아 있었는데, 사용할 수 있는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야 인지하게 된 까닭이다. 아이들과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고, 휴가를 다녀온 지도 오래되지 않아 자리를 비울 상황도 아니어서 망설이다 어렵게 떠난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아내와 단 둘이 여행가방을 들고 나서려니 젊은 날로 시간을 거슬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늘 크리스마스 시즌이나 연말의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익숙했던 곳이었는데 성수기를 벗어난 탓인지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흥분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쉬고 싶었던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아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마주치는 이들은 먼저 웃어 주었고, 한적한 산책길에서도 서로 길을 내어 주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성수기라면 예약을 포기해야 했던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도 긴 기다림 없이 여유를 즐길 수 있었고, 과분한 서비스에 감사의 인사를 하기에도 시간이 충분했다.
이 편안함에 익숙해지니 늘 연말의 황금 시간대를 고집하며 휴가를 다녀온 그동안의 패턴이 미련스럽게 여겨졌다. 물론 아이들의 학교 일정에 맞추었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비수기에 맞본 휴가지의 편안함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루이스는 도미니카 청년이다. 그는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머문 리조트의 레스토랑 웨이터였다. 영어를 따로 배워본 적이 없다는 그가 여행자들을 통해 배운 언어로 즐겁게 소통하며 일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우리는 그가 서빙하는 테이블을 일부러 찾아 앉았고,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아차리자마자 어느 한국인 여행자에게 배웠다는 ‘안녕하세요’를 능숙하게 발음하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내가 짧은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네서였는지, 아니면 백인들 사이에서 드물게 만나는 아시안이어서였는지, 그는 더 친밀하게 다가왔다. 며칠 지켜보니 그는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나 이탈리어 등 그가 아는 각국의 언어로 손님들을 응대하며 그들을 미소 짓게 하고 있었다. 상대의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다.
어느 날, 그에게 각국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와 잘하게 된 비결을 물었다. 그가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상대의 말을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라고 했다. 귀 기울여 듣다보면 처음에 몰랐던 말이 들리고, 그렇게 어깨 너머로 한마디씩 배우며 손님들에게 서비스 하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낯선 땅에서 서툰 영어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나와, 더 좋은 서비스를 위해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고 싶은 청년은 처음부터 꿈꾸는 세상이 다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류 덕분인지 그는 김치와 라면을 좋아했고 나도 모르는 BTS라는 그룹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와 노래를 들으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그는 한국이 특별한 멋이 있는 나라라고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가 느끼는 멋이 한국의 예스러움일까,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서일까. 잠시 생각했다.
그도 언젠가 여행자가 되어 세계 곳곳을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한번도 그가 사는 섬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청년이 꿈에 그리는 세계여행을 하고, 열심히 익힌 언어로 활발하게 소통하는 그 날을 응원해 주었다.
이제, 그가 나의 꿈을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에게도 꿈이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그 꿈꾸던 소년도, 청년도 없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어 지금은 예전에 꿈꾸던 일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만 말하였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꿈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으니 살면서 놓친 일들만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 등 뒤를 가리키며 숨어버린 꿈을 찾아내라고 농담처럼 건넨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느라 현재의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했고, 그래서 이룰 수 없어서 꿈이라 부르는 거라고 치부했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잃어버린 꿈과 숨어버린 꿈을 찾아 오늘이라는 시간 위에서 만나고 싶어졌다.
창밖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이렇게 봄이 그냥 가버릴 것만 같아 초조하다. 해야 할 일이 우선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 날이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꽃향기를 맡으며 꿈을 꾸고 그 꿈길을 따라 걷는다. 5월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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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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