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공연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78세의 노인이 무대를 호령하고 있었다. 기라성 같은 젊은 가수들이 그의 강렬한 스타 파워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4일 LA 오페라가 개막한 스페인 오페라 ‘엘 가토 몬테스’에서 주역을 맡은 플라시도 도밍고는 믿을 수 없도록 젊고 힘 있는 목소리와 열정적인 연기로 청중을 열광시켰다. 아직도 당당하고 멋진 풍채는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기 위해 목숨도 불사하는 젊은 산적두목의 역할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도밍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음악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이다.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오페라 주역가수로, 지휘자로, LA오페라 총감독으로, 오페라콩쿠르 창설자로, 세계가 좁다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플라시도 도밍고는 400년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로 꼽히는 거인이다. 60년 커리어를 통해 150개 넘는 역할을 노래했고 4,000회 넘게 공연한 그의 기록은 앞으로 깨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상급 가수 한 사람이 평생 맡을 수 있는 오페라의 역이 많아봐야 50여개인데 테너로서 이미 120여개 역을 노래한 후 바리톤으로 음역을 내려 새로운 역을 계속 발굴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9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에서 처음 바리톤 주역을 맡은 도밍고는 지난 10년 동안 ‘일트로바토레’ ‘나부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투 포스카리’ 등 베르디오페라에서 깊이와 연기력이 요구되는 바리톤 주역을 집중 공략해왔다. 놀라운 것은 그가 새 역으로 무대에 설 때마다 쏟아지는 비평가들의 찬사가 젊은 시절 공연 때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의 고령과 명성을 감안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라고 감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중년을 넘어서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몸의 모든 부분이 늙는 것처럼 성대 근육도 탄력을 잃고 노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음 처리에서 확연한 퇴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소프라노와 테너의 생명이 가장 짧고, 부단한 연습과 노력 없이는 차차 젊은 시절의 미성을 잃게 된다. 당대에 도밍고보다 인기가 좋았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50대부터 소리가 달라졌고, 새 역이나 노래를 소화하기도 힘들어했던 사실이 음악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면 나이 든 후 도밍고처럼 음역을 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테너가 바리톤으로, 소프라노가 메조소프라노로 음역을 내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각 음역대가 요구하는 목소리 두께와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게 쉽다면 수많은 테너와 소프라노가 바리톤과 메조로 변신했을 것이다.
도밍고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원래 바리톤이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성장한 도밍고는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다가 성악으로 전공을 바꿨고, 1961년 멕시코시티 오페라극장에서 바리톤으로 데뷔했다. 그런데 젊고 잘생긴데다 노래와 연기력이 뛰어난 그의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본 극장 흥행주들이 테너로 전향하라고 적극 권유하는 바람에 테너가 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3옥타브를 넘나드는 넓은 음역과 레제로, 리릭, 드라마티코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다양한 음색,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도밍고는 그냥 바리톤에서 테너로, 테너에서 다시 바리톤으로 옮긴 것이 아니다. 그때마다 음역과 음색의 변화에 자신을 적응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노력했다.
또한 쉬지 않고 공부하는 자세를 빼놓을 수 없다. 가수가 새 역할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악보를 공부하고 선율과 가사를 암기해야 한다. 자기 것만이 아니라 극 전체를 공부해야함은 물론이다. 지휘자로서는 말할 것도 없이 전체 악보를 다 꿰고 있어야한다. “쉬면 녹슨다”(If I rest, I rust)라는 말을 그가 달고 사는 이유다.
몇년전 기자회견에서 “그 많은 역의 노래를 어떻게 암기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도밍고는 “너무 많은 역을 여기저기서 공연해야 하기 때문에 늘 공부하고 있다. 아직까진 기억력이 녹슬지 않아서 집중하면 암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악보를 읽고 공부하는 곳은 주로 비행기 안”이라고 밝혔다. “장거리여행이 너무 많기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비행시간이 공부하기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멜라토닌을 먹으며 시차 걱정을 할 때 팔십노인은 공부를 한다니, 거장은 그냥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도밍고가 출연하는 오페라에 갈 때마다 역사적인 공연에 참석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가수도 걸어간 적이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쓰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기록을 매번 자신이 넘어서는 이 위대한 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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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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