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시계 바늘이 새벽 2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작은 불빛에 의지해 머리맡에 두었던 감기약을 찾아 삼키고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이미 묵직해진 머리는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창밖으로는 어둠 속에 길을 잃은 바람이 시침(時針)처럼 느리게 지나가고, 나는 깜깜한 방에 누운 채 바람이 지나가는 그 길을 따라 나섰다. 뒤뜰에 서있는 나무의 낮은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서걱거리는 눈길을 밟고 마을로 내려오는 사슴 가족의 기척을 느끼며, 그렇게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지고 나니 모처럼의 새벽녘 어둠이 편안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방심한 탓인지 며칠 사이 증상이 제법 다양해졌다. 어쩌면 그동안 일을 쉴 수 없었던 내 상황이 몸이 내는 소리를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과대학 졸업반인 작은 아이는 날마다 전화로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걱정을 하고, 나는 기침을 참으며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는 사이 단조롭던 내 일상을 감기가 지배해 버렸다. 초저녁부터 잠을 청하고 새벽에 깨어 다시 약을 먹고 잠이 들기를 반복하며 겨울과 봄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어둠 속에서 뒤척일 때마다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짝이었던 그녀가 기다리라는 말에 햇빛이 비켜가던 교무실 뒤편에서 하염없이 언 발을 구르며 바람을 세어보던 날도, 그 날의 추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해 낸다.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으며 그를 기억하고, 그 밤을 떠올렸다. 그가 세상에 없어서 아쉽고, 설령 그가 지금 세상에 있다고 해도 그가 바라본 세상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의 시집을 펼쳐 놓고 시집을 건네준 그녀를 떠올리고, 석고처럼 메말랐던 겨울바람도 기억해 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억들은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던 내 청년의 시간에 다가선다. 이제 그 날들은 몇 장의 빛바랜 스냅사진처럼 남아 있지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어차피 불면의 밤이다.
감기에 지배당했던 일상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프랑스 식당에서 아내와 모처럼 느긋하게 저녁을 먹으며 비로소 생일임을 알았던 날도, 오래 전에 예약해 둔 음악회 티켓이 선물처럼 느껴졌던 날도 그러했다. 내 생의 퍼즐 한 조각에 새겨진 와인 한잔만큼의 호사가,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하던 시간만큼의 여유가 고맙게 느껴졌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마른기침을 토해 내면서도 식당 밖을 나서며 마주한 차가운 공기가 춥지 않았다.
오래된 기억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드러나고, 다시 때를 기다려 숨어버릴 것이어서 애써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고, 다음날 내린 비가 눈의 흔적을 지워내고 있다. 그리고 눈 속에 묻혀 있던 봄의 기억이 조금씩 드러났다. 오래된 침묵으로 봉인된 편지를 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봄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며 빈 숲으로 달려갔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지나간 시간만큼의 여백이 있었다. 내 가난한 언어로는 절대 채우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나는 그 여백만큼 걷고 또 걸으며 잔설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자작나무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을 나와 함께 이고 선 어린 새 순이 바람에 흔들렸다.
어쩌면 3월은 겨울과 봄이 사이좋게 함께 사는 달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겨울이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봄이 한걸음 물러선 거라고 여기면서도 그럴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아직은 빈손인 가지 끝에 보라 빛 기도를 희망이라 이름 붙여 걸어두기로 한다.
아내는 이른 아침부터 묵은 화분을 창가에 내어 놓고 마른 잎을 떼어 내며 바쁘게 움직인다. 올봄에는 거실 벽의 페인트 색깔을 바꾸겠다고 벼르더니 색상표를 가져와 햇빛과 그늘에서 번갈아 비쳐보며 색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개나리를 닮은 노란색이 될지, 새 순을 닮은 연둣빛이 될지 아직 모르지만 경건한 봄맞이 의식을 치르고 즐거워 할 아내의 얼굴이 봄볕에 환하게 빛날 것이다. 묵은 가지에서 뽀얗게 고개를 내민 목련이 하얗게 꽃망울을 여는 그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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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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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5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오늘 이곳은 봄볕이 참 좋습니다. 행복한 봄 맞이 하세요.
정치쪽으로 글 올리는 사람들은개판인데
수필가는 역시 글 잘쓰네
기형도!!! 젋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시인. 너무도 일찌기 갔어.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있어 털 모자를쓰고 운동을 하지만, 봄 기운은 몸으로 느낄수있군요, 지구촌 모두에게 이 기운이 지치고 괴로은 몸을 마음을 스르르 녹여 만나는 모든 이웃과 기뿐 마음으로 웃으며 인사를 나눌수있는 매일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