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프레빈이 지난 주 뉴욕 자택에서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결국 지난 30년간 단 한번도 LA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였다. 자신이 성장했고 성공했던 제2의 고향이었지만, LA와의 악연이 그만큼 뿌리 깊었던 것이다.
클래식뿐 아니라 영화음악, 재즈, 팝 등 음악 전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불세출의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앙드레 프레빈은 LA 출신이요 할리웃의 골든 보이였다.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가족과 함께 나치를 피해 8세 때 LA에 정착한 그는 베벌리힐스 하이스쿨 시절부터 영화사에 고용돼 영화음악을 즉흥변주하거나 편곡했고, 오래지 않아 자기가 쓴 영화음악들로 이름을 날렸다. ‘터틀넥을 입은 신동’ ‘미키마우스 마에스트로’라 불렸던 그는 29~35세 사이에 오스카상을 4회나 수상했고, 1961년에는 자신이 쓴 영화음악 3개가 모두 오스카상에 후보지명 된 전무후무한 기록도 갖고 있다. 그는 그래미상도 10회나 수상했다.
젊은 시절 영화와 재즈 음악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서서히 클래식 음악계로 나아갔는데 여기서도 큰 성공을 거두며 거장 반열에 오르게 된다. 휴스턴 심포니, 런던 심포니, 로열 필하모닉, 피츠버그 심포니, LA 필하모닉, 오슬로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역임하는 동안 수백장의 음반을 내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했고, 작곡가로서도 60여곡의 관현악곡과 실내악곡, 피아노 음악 및 성악곡, 오페라와 뮤지컬을 남겼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음악사에 늘 언급되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바로 30년전 LA 필하모닉 시절의 일이다. 프레빈은 1985년 LA필의 제9대 음악감독이 되었는데 당시 부사장이었던 어니스트 플레이슈만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두 사람 모두 오케스트라 경영에서 전권을 행사하려는 파워 게임이었다.
1988년 여름 프레빈은 당시 신예로 떠오르던 에사 페카 살로넨이 수석객원지휘자로 선임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플레이슈만이 내린 결정이었다. 프레빈은 펄펄 뛰면서 “나와 플레이슈만 중 한사람을 택하라”고 이사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사회는 장시간 논의 끝에 플레이슈만을 옹호하는 결정을 내렸고, 1989년 프레빈은 “내 생전에 다시는 LA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며 떠났다.
이후 그는 실제로 LA를 찾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LAX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조차 거부했을 정도로 원한을 풀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앤젤리노들이 지난 30년간 단 한번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연주를 들은 적이 없는 이유다.(그가 떠난 후 살로넨이 음악감독으로 선임되어 1992년부터 2009년까지 17년간 LA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LA필은 과거에도 이와 똑같은 불화를 빚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 필하모닉은 게오르그 솔티를 음악감독으로 초빙하고 3년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그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사회가 26세의 주빈 메타를 부지휘자로 임명한 사실을 알게 된 솔티는 취임도 하기 전에 계약을 파기하고 떠나버렸다.(그가 떠난 후 주빈 메타가 음악감독으로 선임되어 1962년부터 78년까지 16년간 오케스트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아무리 깊은 상처도 시간이 흐르면 치유되기 마련이다. 프레빈은 LA 필은 용서한 듯하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LA필이 역대 음악감독을 모두 초청한 다양한 축하 프로그램을 마련하면서 프레빈에게 신곡을 위촉했는데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새 작품은 오는 10월 초연 예정이었다. 그가 작품을 완성했는지 어떤지, 초연 때 LA에 오려고 했는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프레빈은 플레이슈만(2010년 작고)에 대해서는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던 것 같다. LA필이 작년에 발간한 100년사(‘Past/Forward: The LA Phil at 100’)에 “나는 아직도 어니스트 플레이슈만에 대해 광적인 증오를 갖고 있다”고 말한 최근 인터뷰 내용이 기록돼있기 때문이다. 음악계에서 그렇게나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 죽음도 용서하지 못할 분노를 안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적이다.
앙드레 프레빈의 부음이 전해진 2월28일 저녁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열린 말러 교향곡 9번의 연주회에 갔었다. 무대에 오른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은 청중에게 프레빈의 타계 소식을 전하면서 “이 연주회를 LA 필하모닉의 전 음악감독이었던 프레빈에게 바친다”고 말하고 잠시 묵념한 후 지휘봉을 들었다. 말러 9번 심포니는 지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 너머로 떠나는, 삶과의 고별을 그린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LA 필로서 앙드레 프레빈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조의를 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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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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