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된 게 아닙니다. 구직 인터뷰를 정말 많이 다녔어요. 낙방도, 실망도 수없이 했지요. 그렇게 경력을 쌓으며 생존해 온 결과 애플에서 탄탄한 입지를 갖게 되었어요. 이제는 내가 구직 인재들을 인터뷰하면서 누가 조직에 기여할 사람인지 판별하고 선발하는 ‘갑’의 입장이 된 거지요.”
일주일간의 실리콘밸리 투어를 위해 50명의 학생과 지도교수 등 63명의 대규모 방문단을 환영하는 만찬행사가 열리는 호텔의 연회장이다. 내가 지역 동창회장은 맡고 있는 모교의 후배들로 여행비용은 학교가 전액 지원했다. 인생의 온갖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른 선배들의 진솔한 실리콘밸리 실전 경험을 경청하는 학생들의 눈은 반딧불처럼 반짝거린다.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인재와 관광객이 몰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삶은 장밋빛 환상으로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니고 치열한 자기계발과 철저한 생존전략이 뒷받침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경험담은 방문학생이 아니라 누구라도 무릎을 치게 되는 이야기이다. 소중한 경험담들은 학업을 마치면 곧 글로벌 기술의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할 후배들에게 금과옥조로 작용할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아니, 나를 떨어뜨리다니...” 동아콩쿠르 1등, 국립무용단 수석 무용수 등의 화려한 경력으로 17년 전 자신만만하게 태평양을 건너와 오디션을 치렀으나 보기 좋게 낙방한 유명 무용가인 여성 동문의 솔직한 자기고백이다.
만약 그때의 실패를 그녀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재도전의 계기로 승화시키지 못했더라면, 후일 무용계의 최고영예인 이사도라 던컨 상을 수상하는 일도, 올해 13년 만에 또 다시 수상자로 지명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반도체 웨이퍼 실물과 완성된 칩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 후배들에게 반도체에 대한 개념을 심어주려 애쓴 여성 엔지니어 동문도 있다. 문과대학 졸업 후 동부로 유학왔고 지금은 반도체 전자산업 전문 컨설팅기업을 운영하며 실리콘 밸리를 누비는 그의 하이톤 스피치는 내이도를 통해 학생들의 뇌리에 속속 박히는 모습이다.
스탠포드 의대에서 희귀병 치료법을 개발하느라 애쓰는 선임연구원, 몬테레이 국방언어대학원에서 교수들을 지도하는 박사, 내로라하는 휴대폰 칩 업체 퀄컴 또는 핵심 근거리 통신 부품을 생산하는 브로드컴과, 무인자동차 산업의 부상과 함께 호황을 맞은 그래픽정보 처리용 핵심칩 생산업체인 엔비디아의 엔지니어 등 동문들의 체험담은 계속 이어진다. 약속된 두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우리는 아쉬운 작별인사로 후배들을 격려해 주었다.
어떠한 실패에도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이 세계가 알아주는 선진국이 된 비결이다. ‘헬조선’이니 하며 자조 속에 덧없이 청춘을 흘려보내는 일부 한국의 젊은이들은 생각을 고쳐먹고 단단히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
한국동란 직후의 폐허 속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 배를 곯아야 했던 우리의 선배들은 국가 지원금을 기대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하는 나약한 투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지극히 낮고 깊은 곳으로 달려가 피땀을 흘렸다.
서독 탄광의 지하 1,000m, 땀이 비 듯하는 막장으로 내려가 석탄을 캤고, 백의의 천사 간호사들은 역한 냄새와 흐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이방인들의 시체를 닦고 또 닦았다. 목숨을 걸고 월남전에 참전해 피 묻은 외화를 벌어와 나라를 키우는 비료로 썼던 선배들도 있다.
세월은 꿈같이 흘러 창경원 돌담길을 따라 대성로를 걸어 통학하던 시절로부터 근 40년이나 흘렀다. 만 33세에 직장에서 보내준 우수사원 포상여행으로 꿈에도 그리던 첫 해외여행을 간곳은 서태평양의 미국령 괌이었다.
그동안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멈추지 않은 한국경제는 이렇게 대부분 만 20세가 안 돼 법적으로 와인 건배조차 할 수 없는 공대생들을 전액 경비지원으로 실리콘밸리 여행을 시켜줄 수 있게 되었고,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는 연간 700만명이나 다니러 가는 호시절을 불러왔다.
올겨울 들어 모처럼 매우 찬 날씨다. 과거 이맘때 쯤 한국에서는 시베리아에서 월동하러 한탄강변에 날아온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소식을 알리며 ‘겨울의 진객’이 왔다고 보도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순탄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수많은 사연과 경로를 거쳐 단련되어온 나도 이제 지역 동창회장이 되어 겨울의 진객 재두루미 같은 후배들을 맞이하고, 발표자들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이는 총기 넘치는 방문단 앞에서 환영사를 전하는 멋진 순간을 갖게 될 줄이야.
우리네 인생은 앞으로 어떤 멋진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점에서 한편의 영화처럼 음미하면서 살아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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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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