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하늘나라로 가신지가 벌써 일 년이 되어간다. 성경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라고 하였지만, 나를 위해 늘 기도하시던 아버님이셨기에 그리움이 더하다.
시간은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무거운 안개처럼 느껴진다. 죽음은 “온전한 상태에서 태어나 시간 속에서 외부의 도전에 조금씩 지쳐가는 노화현상을 거쳐, 극심한 불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필요하고도 고마운 과정이다.
사망 후에 아버님은 다시 완전하게 평안한 곳에 계시지만 이제 철이 나서 아버님께 더 효도를 해야 되는데 옆에 안 계신다.
시간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의술에서 중요한 일은 없다. 아무리 좋은 치료도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효과가 약화된다. 출혈이 있을 때 쇼크로 빠지기 전에 조치해야 되고, 중풍이 왔을 때도 몇 시간 내로 혈전용해제를 쓰면 효과가 크지만 늦으면 부작용만 많다.
심장마비 때에는 화급을 다투어 약으로 할 것이냐 시술이나 수술을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콩팥이 역할을 못하는 경우 언제 투석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너무 일찍 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시간을 끌다보면 몸이 심하게 상하기 때문이다.
심장의 박동은 음악에서 나오는 박자만큼 정확하다. 원래 심장의 정상박동은 2/2 박자 규칙이지만, 엇박자로 나오거나 불규칙이면 부정맥이라 부른다. 부정맥 중에서도 규칙성이 있는 경우는 덜 위험하지만, 지속적으로 불규칙적인 경우에는 심방 세동이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심장이 제대로 뛰지 못하고 부르르 떨기 때문에 심장 안에 고여 있던 피에서 혈전이 생길 수 있고, 응고된 혈전이 뇌로 가는 경우에는 중풍이 온다.
인생사에서 시간의 중요성이 어찌 의학에만 국한 되겠는가? 사업의 적절한 시기, 때에 맞는 전공분야의 선택, 필요한 사람과의 운명적 만남은 물론, 자식에게도 더 잘해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있는 것 같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드니 아이들은 벌써 내가 별로 도와줄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릴 때는 무척 귀엽던 아들이 사춘기 때는 영 마음에 안 드는 돌출 행동을 해서 내 속을 많이 뒤집어 놓았었다.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아들은 학교 아침시간을 종종 빼먹고 파도 타기한다고 바닷가로 데려다 달라고 졸랐다. 파도는 새벽에 좋기 때문이다. 한인부모로서 학교에 안가는 녀석을 바닷가에 데려다주는 심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참고 기다렸다.
고등학생 때는 미국에서 돈 많이 버는 환경 미화원이 되겠다고 한 때도 있었다. 아내는 “그렇다면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학교 안가는 사람은 밥도 용돈도 스스로 해결하라”고 아들과 기 싸움을 벌였다. 두 사람을 보는 내 심정은 초조했다. 한번 한 말은 꼭 시행하는 아내의 냉정함에 아들은 배가 고팠던지 학교에 다시 가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드디어 때가 되어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아들은 의학공부를 더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적성에 맞으면 해보라고 권면했더니 어느덧 의과졸업반이 되어 이비인후과 수련의 자리를 찾아 면접시험을 보러 다니고 있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계절이 바뀌듯 아이들도 변화하는 모습을 본다.
동료 의사는 의과대학에 들어간 후에 갑자기 공부에 싫증을 느껴 수업을 빼먹고 놀다가 낙제통보를 받았다. 학비충당도 큰일이라 무거운 마음으로 어머님께 말씀드렸다고 한다. “제가 1학년을 다시 다녀야 될 것 같아요.”
잠깐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님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중요한 공부를 1년 더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담에 너는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그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나서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탄과 희망의 계절이다.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우리를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께서, 완전한 때에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소망을 주신 계절이다. 커가는 자식들을 보며, 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간다. 성경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사랑 나눔이 더 필요한 때임을 절실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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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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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공감되네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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