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보, 한인사회와 50년 | LA한인타운 변화상
1970년대 한인인구·업소 급증 코리아타운 태동…1980년대 부동산붐 타고 타운 할리웃까지 확장
▶ 1990년대 LA폭동·지진·차압 불경기·IMF 한파…2000년대 윌셔 개발·건물매입 활기… 고층 속속
2010년대 재개발 붐에 잇단 대형건물 신축 열기
윌셔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인들이 가장 많은 고층 빌딩을 소유하고 프로페셔널들이 주로 일하는 거리 로 발전했다. ‘차 없는 거리’ 행사인‘ 시클라비아(CicLAvia‘) 가 열린 윌셔가의 모습.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50년은 강산이 5번이나 변할 장구한 세월이다. ‘LA한인타운의 50년 전과 오늘’사 이의 변화는 실로 상전벽해라고 일컬을 만큼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올림픽가에 수십개에 달했던 한인업소가 현재는 1만여개가 넘고 1992년 LA폭동의 여파로 인한 ‘탈 LA현상’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던 LA 한인타운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이어지는 경기호황으로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한인들의 주거지로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2008년 시작된 경제위기로 한때 주춤했던 한인타운 개발은 2010년 대 초반부터 경제가 회복되면서 이제는 자고 일어나면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기존 오피스 건물은 주거용 건물로 전환되고 대규모 호텔도 들어서는 등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LA한인타운의 지난 50년을 조명해본다.
■1970년대(1970~1979)
70년대 LA한인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사회의 변해가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인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날마다 새로운 한인업소가 문을 열면서 코리아타운의 골격이 잡혀갔다. 70년에 1만명으로 통칭했던 남가주 한인인구는 70년 12만~15만명으로 불어났고 첫 번째 업소록에 69개에 불과했던 한인업소는 10년이 채 못돼 올림픽과 8가에만 300여개로 늘어났다. 올림픽가의 땅값이 치솟았던 70년대는 미 주류언론들이 이곳의 이례적 부동산경기 붐을 특집으로 다룰 만큼 올림픽가 전성시대였다.
▲1973년
바야흐로 올림픽가 전성시대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한인상권의 구심점이 될 ‘코리아 타운’ 건립을 구체적 목표로 한국타운 번영회가 2월21일 정식발족했다. 올림픽가 한인업소 주인 10여명이 창립회의에서 올림픽가 놀만디 애비뉴와 웨스턴 애비뉴 사이를 1차 코리아타운 후보지로 구상했다. 번영회는 한 달 후 올림픽가 8가, 웨스턴과 버몬트 구간으로 타운 규모를 확대 추진키로 하고 이 지역 51개의 한인업체의 전폭적 지지 서명을 받으며 한글간판달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LA 한인타운이 드디어 태동하게 된다.
▲1974년
1월31일 현재 올림픽 블러버드를 끼고 후버에서 크렌셔까지 30여 한인업소가 있었으나 그해 말까지 50여 업소로 늘어났다. 당시 땅값은 스퀘어피트 당 10달러선. 올림픽 인근 단독주택 가격은 30년된 3베드룸 짜리가 2만5,000달러에서 3만달러였고 아파트는 한 유닛 당 1만달러, 렌트 1년 수입의 6배 정도 가격으로 매매되었다.
웨스턴과 버몬트를 중심으로 한 올림픽 일대는 갑자기 한인 상가가 몰려들기 시작해 점차 코리아타운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당시 본보가 집계한 한인 업체는 45개 업종, 130여개 업소에 달하고 있으며 투자액도 500만~600만달러에 달하고 있다. 올림픽가 땅값이 폭등해 11월29일 기준 스퀘어피트 당 20달러에 거래되었다.
11월3일 올림픽가에서 코리아타운 번영회가 주최하고 한국일보 LA지사 주관으로 벌어진 제1회 코리안퍼레이드에는 웨스턴에서 놀만디까지 올림픽가 연도에 3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재미한인사회 사상 최대 한인 인파에 한인들 스스로도 놀랐다. 올림픽 거리가 LA한인타운의 중심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1977년
당시 LA타임스가 8월16일자에서 ‘20세기 문명에 물들지 않은 민속지대’라고 표현했던 코리아타운의 한인업소는 290개소로 이중 80개가 올핌픽가에 위치해있었다. 9월21일 발표된 한인상공회의소의 남가주 한인 실태조사(76년 기준)에 따르면 한인중 3분의 1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운영경력은 평균 2년9개월, 평균자본금은 1만1,900달러로 업소의 73.4%가 5명이내의 종업원을 두고 있었다. 또한 한인가정의 절반 이상이 맞벌이로 월 1,000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었는데, 당시의 월평균 주거비와 식품비는 각각 200달러 선이었다. 주택 소유율은 27.9%로 나타났다.
▲1979년
미 주류언론들이 한인이민들의 경제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무렵으로 2월25일자 LA타임스는 지난 6년동안 급팽창한 코리아타운의 부동산 경기를 대서특필했다. LA비즈니스 1번지인 윌셔가의 땅값이 스퀘어피트당 12달러인데 비해 올림픽가는 20달러로도 사기 힘들었다. 당시 올림픽과 8가의 한인업소는 300여개소, 샤핑센터 건축이 붐을 이뤄 6월중순 올림픽가의 VIP 플라자와 웨스턴가의 웨스턴 플라자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1970년대 LA한인타운은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미주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타운의 기틀을 다지게된다. 1976년 올림픽가 코리안 퍼레이드 모습. <본보자료 사진>
■1980년대(1980~1989)
인구는 40만으로 통칭되었고 업수 수는 2만을 넘어섰다. 동서남북으로 한정없이 뻗어가는 코리아타운, 자고 일어나면 부쩍 부쩍 달라지는 한인 인구, 남가주 어느 구석에도 자리잡고 있는 한인사회의 팽창은 눈이 부셨다. 팽창의 속도가 너무 빨라 한인사회속에 살고 있는 한인들도 커뮤니티의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최전성기였다. 계속 방대해진 코리아타운은 70년대 올림픽 전성시대를 지나 80년대엔 8가 시대로 접어들었고 8가도 포화를 이룬 80년대 후반엔 웨스턴을 따라 할리웃까지 북상했다. 80년대 한인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부동산붐이었다. 너도나도 아파트와 상가를 다투어 매입했고 순수한 한인자본뿐만 아니라 한국 대기업까지 가세, 뜨겁게 달아오른 투자열기로 한인사회에는 부동산 부자들이 상당수 등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투자과열은 89년 부동산 경기 급강하기부터 그 후유증을 드러내면서 90년대 한인경제불황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1981년
8월 ‘코리아타운’ 표지판이 올림픽과 버몬트, 웨스턴과 올림픽 코너에 등장, 코리아타운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고, 10월에는 8가에 한인파출소가 출범, LA경찰국과 한인 커뮤니티가 범죄퇴치를 위해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1983년
한인사회가 커지면서 미 주류언론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 3월 CBS TV가 뉴스시간에 버몬트에서 3가,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코리아타운 발전상을 소개했다. 한인 상가는 올림픽과 8가에 편중돼 있다가 이들 지역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웨스턴을 따라 북상하는 추세를 보였다.
▲1980년대 중반
1984년 한인 업소들이 웨스턴을 따라 6가에서 멜로즈까지 계속 진출, 새로운 한인 상가를 형성했다. 1988년 70년대 코리아타운 형성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올림픽 마켓이 12월 문을 닫았다.
▲1988년
부동산 붐의 피크였다. 대형부동산 투자열기도 더욱 가속화, 샤핑센터나 아파트에서 대형 오피스빌딩으로 매입 규모가 커가는 추세를 보였다. 대형빌딩매입은 순수 남가주 한인자본에 의해 시작되기는 했지만 해외투자 자유화 바람을 타고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부동산 시장에 눈길을 돌리면서 활발해졌다. 또한 LA 한인타운 최초의 샤핑몰 코리아타운플라자(KTP)가 개장했다. LA 한인타운의 심장부에 위치한 코리아타운 플라자는 샤핑, 장보기, 뱅킹업무까지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한인 사회의 원스탑 샤핑공간으로 2013년에 작고한 유명건설회사 ‘그루엔 어소시에이츠’의 박기서 대표가 설계했다.
올림픽가는 예나 지금이나 LA한인들의 ‘마음의 고향’같은 곳이다. 한인타운에서 가장 많은 비즈니스가 밀집해 있고 이제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물론 주거공간으로도 발전해가고 있다. <박상혁 기자>
자고 나면 아파트·호텔 들어서는 ‘발전 아이콘’■1990년대(1990~1999)
1990년대는 LA폭동과 노스리지 지진의 여파로 인한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한인경제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하루 6명꼴로 주택차압을 당하던 폭동 서너달후부터 한인 파산이 1년 450명을 기록하는 등 1990년대 중반 넘게 불경기가 계속되었다. 특히 한국 IMF의 영향으로 한국에서의 연수, 관광 발길이 뚝 끊겨 휴가철 대목을 기대하던 여행사, 호텔, 선물점들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MF가 한파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높은 달러가로 인한 환차익이 있는 데다 부도 위기 회사들이 헐값에 물건을 내놓아 값싼 한국제품들이 타운에 물밀듯 들어왔다. 한국의 공장 창고 물건을 통째로 때어오는 땡치기가 성행, 한인타운 곳곳에 한인 유명상표 할인매장들이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1990년대 한인타운은 윌셔시대로 접어들었다. ‘LA의 월스트릿’으로 불리우는 윌셔가로 한인들이 속속 진출하면서 미드윌셔의 중심지인 버몬트-웨스턴 구간은 올림픽가에 이어 한인타운의 대동맥이 되었으며 한국일보도 1997년 윌셔의 신사옥(4525 Wilshire Bl.)으로 이전했다.
▲1997년
1960년대와 1970년대 제퍼슨 가에 있었던 한인사회의 구심점은 1980년대 버몬트를 중심으로 올림픽가로 북상한 뒤 90년대 들어 윌셔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민 1세가 주를 이루던 한인사회 인력이 세대교체와 함께 전문직, 사무직 종사자가 늘어난 것이 한 요인이 되고, 백인들이 80년대 말부터 윌셔가를 빠져 나가면서 윌셔가 빌딩들이 한인소유로 많이 바뀐 것도 한 요인이 됐다. 상업용 부동산 회사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97년말 현재 버질과 하일랜드 사이 윌셔가 건물중 한인소유가 23개로 전체 임대 사무실용 건물 면적으로 보면 40%에 달하는 공간이었다.
▲1990년대 후반
1992년의 폭동과 1993년의 대형산불, 1994년의 대지진 여파로 많은 건물들이 헐값에 매물로 나왔을 때 제이미슨 프라퍼티스의 데이빗 리 대표가 1995년 윌셔 블러바드에 첫 부동산을 매입했고 예상을 뒤엎은 경제 활성화로 부동산 가격도 함께 급등하면서 윌셔가에 한인들의 상업용 건물매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0년대(2000~2009년)
2000년대 들어 경기가 호황세로 접어들면서 윌셔가 개발과 건물 매입은 활기를 띠었다. 한인타운 윌셔가의 상당수 상업용 건물을 제이미슨 프라퍼티스(대표 데이빗 리)가 소유했으며 2006년 7월 기준 제이미슨 프라퍼티스가 소유한 건물이 남가주 지역에만 94개, 텍사스주 등 타 지역까지 합하면 100여개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6월 LA에 윌셔가 한복판에 미주한인사회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스파 센터 ‘아로마윌셔센터’가 건립되면서 한인타운에도 본격적인 스포츠 센터 시대의 개막을 알렸으며 경제위기가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서 추진되었던 주식회사 신영의 40층 콘도개발은 무산되었고 윌셔와 웨스턴의 대형주상복합 솔레어는 2000년대말 완공되면서 초기에 분양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는 한인타운 최고급 콘도의 대명사가 되었다.
▲2000년
8월18일 한미박물관, 한인가정상담소, 한미연합회, 한인건강정보센터, 한인청소년회관 등 대표적인 한인 1.5세 5개 봉사단체들이 공동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코아(KOA)센터(3727 W. 6th. St)건물을 220만달러에 매입했다. 코아의 결성과 코아센터의 구입으로 한인사회가 힘을 합쳐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1년
LA한인타운 윌셔가에 첨단 스포츠 센터인 ‘아로마 윌셔 센터’가 2001년 6월21일 개장했다. 총면적 33만6,000스퀘어피트에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빌딩인 아로마 센터는 수영장과 골프레인지 등을 갖춘 첨단 시설의 스포츠 시설일 뿐 아니라 소매업체도 입주해 있으며 주류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한인타운을 대표하는 스포츠센터이다.
▲2006년
한국 부동산 개발회사 신영그룹의 미주법인인 신영아메리카는 윌셔와 호바트 교차로에 40층짜리 초대형 주상복합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내놓았지만 금융위기 등으로 무산됐다. 이 자리에는 우여곡절을 거쳐 주류 부동산 투자사인 ‘시티뷰’가 소유, 개발한 럭서리 아파트 펄 온 윌셔(3670 Wilshire Bl. LA)가 들어서게 됐다.
▲2008년
LA 한인타운 윌셔와 웨스턴에 최고급 주상복합 콘도 ‘솔레어’(Solair)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총 1억6,000만달러가 투자돼 지하 1층, 지상 22층 규모로 9만스퀘어피트 부지에 건평 75만스퀘어피트 규모에 고급 콘도 186유닛과 4만스퀘어피트의 리테일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여서 분양 초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2010년대(2010~2018)
LA 한인타운을 대표하는 종합엔터테인먼트 샤핑센터 ‘마당’이 2010년 6월4일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한인타운 개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LA 한인타운에 전례가 없는 대대적인 거주용 부동산 재개발 붐이 일면서 한인타운에 녹지공간 등 여유공간은 사라지고 주상복합과 콘도 및 아파트 등만 들어서고 있다.
‘LA 한인타운은 삽질 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다. 조그만 자투리 땅만 있으면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기존 오피스 건물을 주거용 건물로 전환하는 용도 변경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수백 개 유닛이 들어서는 고층이나 대형 주거용 건물 신축도 연달아 진행되었다.
최근 5년간 LA 한인타운은 상가와 오피스 건물, 아파트와 콘도 등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매물 품귀현상이 심화되고 ‘부르는 것이 값’일만큼 가격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가 최근 들어 주춤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인타운 내 대형 아파트들은 대부분 주류 투자자들이 지난 수 년간 경쟁적으로 매입해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 제이미슨 프라퍼티스를 중심으로 한인 투자자와 중국 투자자들도 LA 한인타운 부동산 시장에 가세하면서 매물 확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한인타운에 이미 시작됐거나 계획된 재개발 주거용 프로젝트만 80여개에 달하고 있다.
LA 한인타운 상업용 부동산이 이같이 인기를 끌고 있는 주요 이유로 ▲한인들이 거주지역으로 선호하고 있고 ▲한인 상권이 제공하는 다양한 샤핑·문화 혜택 ▲교통 요충지의 편리함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치안 ▲한인, 백인, 히스패닉 등 다민족 거주 등의 이유로 투자자들로부터 LA시에서 가장 역동적인 투자 및 거주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LA 한인타운의 모습은 실제로 주거하면서 비즈니스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면서 타인종과 어울려 살아가는 다아내믹한 ‘삶의 현장’으로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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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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