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쯤 보스턴에 사는 친구를 방문했다가 하버드 대학교 교정을 찾은 적이 있다. 교정에는 창립자인 존 하버드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동상의 왼쪽 발을 만지면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왼발 끝은 반짝반짝 광이 나있었다.
“너도 아이를 키우니 한 번 만져보라”던 친구의 권유에 따라 나도 멋쩍게 손을 들어 올리면서 “아마도 이건 아시안들, 특히 한국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닳았을거야”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유난히도 교육열이 높은 한국인들에게 하버드는 꿈의 학교이다. 자녀가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하면 부모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한 이민자로 주변의 부러움을 산다. 그 꿈의 학교와 아시안들이 ‘어퍼머티브 액션’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시행됐다. 그 요지는 지금까지 장기간에 걸친 극심한 차별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소수계 학생들을 백인 학생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경쟁시키는 것은 불공평하며, 따라서 연방기금의 지원을 받는 기관들은 이들을 배려해 다른 기준을 적용토록 한 것이다.
하지만 50여년이 지난 후 어퍼머티브 액션은 미국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사정이 달라졌다”며 오히려 백인에 대한 역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시험대에 놓이곤 했다.
여기서 미묘한 것은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안들의 입장이다. 나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는데, “소수계를 위한 배려이긴 하지만, 공부 잘하는 우리 아들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할 문제가 아닌 듯싶다. 문제는 어퍼머티브 액션의 취지는 무엇이고 우리는 과연 이것이 없어도 될 만큼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의 취지는 인종에 따른 할당제가 아니다. 대학 입학의 경우 이것은 학생의 인종을 포함해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까지를 고려하는, 대학 커뮤니티의 다양한 구성을 목적으로 한다.
한 학생이 지닌 잠재력을 평가할 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지금까지의 배경을 고려한 다양한 기준이 아니라 점수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과연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더욱이 의심스러운 것은 지금의 타이밍이다. 트럼프 정부가 어퍼머티브 액션을 손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정황이다.
지난해 뉴욕타임스는 법무부 내부 문건을 입수해 “법무부가 대학입학에서 인종에 기반을 둔 의도적인 차별에 대한 조사와 관련 소송을 맡을 변호사를 구하는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으며, 현재 하버드를 상대로 한 소송을 이끌고 있는 에드워드 블룸은 66세 백인 남성으로 백인 보수단체의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다.
2008년 백인 여학생 애비게일 노엘 피셔를 내세워 텍사스 대학교를 상대로 역차별 소송을 제기했다 패한 전력이 있는 그가 이번에는 좀 더 ‘먹힐 것 같은’ 아시안을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터 백인 보수층이 아시안의 권리에 그다지도 관심이 많았던 것일까. 아시안들은 지금까지 백인 보수층들에게 ‘모범적인 마이너리티’로 칭송(?)받아 왔으며, 불만을 제기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커뮤니티에 “다 너희들이 게으른 탓”이라는 방패로 사용되어 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리고 막상 아시안들이 그들의 아성을 위협하는 경쟁상대로 부상한다면 그들의 태도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그 때가서 우리는 누구와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나도 공정하지 않은 경쟁에는 반대한다. 물론 어퍼머티브 액션이 완벽한 제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퍼머티브 액션 탄생 배경이 바로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였음을 이 땅의 소수계인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송의 목표가 공정한 경쟁이라면 차라리 소수계 배려가 아닌, 자자손손 금수저를 물려줄 수 있는 ‘레거시 어드미션’을 타겟으로 하면 어땠을까.
어퍼머티브 액션이 폐지되어 사회적 약자들의 대학문턱이 높아진다면 그 사회적 비용은 사회 전체가 부담하게 된다. 그리고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교실에서 얻는 지식만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다인종의 학생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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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국제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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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저도 공감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엄마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아이가 아니라 온인류의 아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