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보자기 워크샵에 참석한 적이 있다. 여러 종류의 천으로 다양한 선물 포장법을 배우는 원데이 클래스였다. 연말에 색다른 선물 포장을 해보고 싶다는 친구를 좇아 얼결에 따라갔는데 어찌나 놀랍고 재미있던지, 보자기 아트라는 새로운 세계를 일별한 기회였다.
노방천 홑보자기로 와인 병처럼 길쭉한 선물을 싸는 ‘수국 매듭’을 배웠고, 겹보자기로는 직사각형 박스를 싸는 ‘궁중 매듭’을 배웠다. 또 작은 양단 보자기로는 향수, 초, 화장품, 보석 등 작은 선물을 싸는 ‘맨드라미 매듭’을, 소박한 면보로는 책이나 지갑 등 납작한 물건을 쌀 때 유용한 ‘단아한 매듭’을 익혔다.
거의 비슷한 크기의 네모난 천으로 수많은 모양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마치 요술과 같았다. 단지 접고 묶고 매듭짓는 순서를 요리조리 달리할 뿐인데도 수많은 보자기의 변주곡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한국보자기아트협회의 공인 강사로 지난 9월부터 남가주에서 처음으로 보자기 워크샵을 열고 있는 엘렌 리(‘노씨보자기’ 대표)씨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천을 이용해 다양한 디자인을 창조하는 보자기 아트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보자기 꽃, 보자기 가방, 매듭, 나비, 리본 등 손재주 좋기로 유명한 한국 여성들이 무한한 창의력을 펼치고 있는 모양이다.
보자기 싸는 방법만도 지금까지 50가지가 넘게 개발됐을 정도로 활발하게 진화하고 있다고 소개한 이씨는 미국에서도 보자기 아트에 대한 인기와 수요가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주변에 크게 알리지도 않고 인스타그램(@nossibojagi)에 사진을 올리는 정도로만 홍보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다는 그는 오히려 1세 한인들보다 보자기를 잘 모르는 2세와 타인종들이 더 열광한다고 전했다.
왜 보자기일까? 일단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천을 만지는 행위가 정서적 안정감과 힐링을 가져다주고, 직접 천을 동여 묶고 예쁘게 포장하면서 경험하는 작은 성취감이 요즘 흔히 말하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 일반 포장 재료는 뜯는 순간 쓰레기가 되지만 보자기는 몇 번이라도 재활용 재사용이 가능한 친환경 재료라는 점, 아울러 한국적 아름다움을 외국에 알릴 수 있는 문화 아이템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한류의 대열에 올려도 좋을 것이라고 엘렌 리씨는 강조했다.
보자기는 오래전부터 한국의 어느 집에나 몇 개씩 있었던 ‘촌스런’ 생활용품이었다. 책을 싸면 책보, 상을 덮으면 상보, 애기 싸는 보, 이불 덮는 보, 도시락 보… 그런가 하면 얼굴이나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가리고 덮고 깔고 매고 펴는 등 온갖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네 귀퉁이를 대각선으로 묶기만 하면 어떤 물건이든 들고 다닐 수 있는 정겨운 운송수단, 그러나 서구화 바람에 밀려 어느 틈엔가 장롱 깊숙이 처박히고 만 것이다.
보자기 예찬론자로 유명한 한국의 석학 이어령 교수는 2015년 출간한 책 ‘보자기 인문학’에서 카멜레온 같은 보자기의 특성을 동서양의 문화에 비교하여 기발하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싸다’와 ‘넣다’의 대립으로 보는 그는 한국은 보자기로 ‘싸는’ 문화인 반면 서양은 가방에 물건을 ‘넣는’ 문화다. 가방이나 트렁크는 정해진 형태 속에 물건을 맞춰서 넣어야 하지만 보자기는 물건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는 유연성이 있고, 풀어지면 다시 자기 모양으로 돌아오는 겸손한 도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복과 양복의 차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옷이 사람을 ‘싸는’ 한복은 융통적이고 포용적인 반면, 모양이 잡혀있어서 옷 속에 몸을 ‘넣는’ 양복은 틀과 제도를 중요시하는 서양 문화의 소산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양복은 사람이 입지 않아도 자기 형태를 지니고 있는 입체성 때문에 벗어도 걸어놓아야 하지만, 한복은 벗은 다음 개켜놓으면 마치 보따리를 푼 보자기처럼 평면성으로 돌아간다는 지적이다. 앞으로 오는 생명주의 시대에는 아이를 요람과 같은 상자가 아니라 포대기로 감싸 업어주는 보자기형 문화를 통해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교수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가 글로벌 미래 문화를 선도할 수 있다고 이 책에서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까지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집에 있는 보자기 하나 꺼내서 얼마나 예쁘게 사용할 수 있을지 싸고 묶고 매듭지어본다면 보자기 아트라는 게 한국인의 유전자에 새겨진 생활예술임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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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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