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평소와 다른 청중으로 객석이 가득 찼다. 유대인을 비롯해 중동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히잡을 쓴 여성과 아이들도 보였다. 객석의 들뜬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이날의 주인공은 ‘웨스트 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WEDO).
철천지원수지간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란 등 중동국가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음악을 연주하는 세계 유일무이의 관현악단이다.
WEDO는 유대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작고)가 1999년 중동의 분쟁국가 청년들을 모아 설립한 단체다. 세계에서 가장 정세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 수천년 동안 나라들 간 전쟁과 보복이 그치지 않는 곳,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적국인이 모두 잔혹한 살인마라고 배우며 자라는 곳, 때문에 접촉이나 대화는커녕 서로에 대해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곳… 이 화약고 같은 중동 지역의 청소년들을 음악이란 매개체를 통해 한 자리에 모아보자는 실험적인 서머 워크샵이 시작이었다.
애초부터 화합과 평화는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다 같은 ‘인간’임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시작했던 이 실험은 다음해에도 이어졌고, 연례 서머 워크샵이 되면서 청소년오케스트라로 발전했다. 그리고 명장 바렌보임의 지도 아래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급성장하면서 세계 순회공연을 다니게 됐고, 음반이 벌써 10장이나 나왔다.
이 오케스트라에 관한 다큐멘터리 ‘아는 것이 시작이다’(Knowledge is the Beginning)는 2006년 에미상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독일 베를린에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하고 야수히사 토요타가 음향을 설계한 상주 콘서트홀(‘피에르 불레즈 잘’)과 교육기관(‘바렌보임-사이드 아카데미’)까지 갖추게 되었을 만큼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WEDO는 2011년 한국의 DMZ에서 연주했고 미국에도 여러 차례 왔으나 LA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디즈니 홀은 콘서트 시작 훨씬 전부터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 양쪽에서 입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등장했을 때는 열렬한 환호가 한참동안이나 이어졌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연주는 내내 감동과 열정의 도가니였다. 오랜 세월 거장의 손길로 다듬어진 연주의 내용도 훌륭했지만 이들의 음악을 보고 듣는 것 자체가 큰 격랑이며 감동이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 전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살아서 펄펄 뛰는 아름다운 유기체였고, 누가 이스라엘인이고 누가 팔레스타인인인지 누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에서 왔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는 연주였다.
열화 같은 세 번의 커튼콜 끝에 바렌보임이 지휘봉을 올리자 흘러나온 앙코르 곡은 바그너의 ‘뉘렌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과연 이스라엘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 바렌보임다웠다. 유대계이면서도 평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해온 그는 유대인들에게 금기시된 바그너의 작품을 이스라엘에서 연주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등 자기소신과 주장을 굽히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오케스트라가 모든 나라에서 갈채와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단원들의 나라인 중동국가들에서는 환영은커녕 비난이 쏟아지고 있고, 심지어 많은 곳에서는 이들의 연주 자체가 불가능하다. 안전문제도 있고 감정적인 이유도 있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절차상의 문제로, 굉장히 복잡한 정세 때문에 국적이 다양한 단원들의 입국과 이동경로가 제한되는 탓이다.
단원 모두의 출신국가에서 연주할 수 있다면 WEDO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는 바렌보임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오케스트라가 결코 평화를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다. ‘디반’은 다만 무지에 대한 반발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상대방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나와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그의 바람대로 음악이 중동인들 마음의 벽을 허무는 평화의 첫 걸음이 될 수 있을까? 굉장히 중요한 시도이고 아름다운 모험이긴 하지만 다큐멘터리 ‘아는 것이 시작이다’를 보고 난 소감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나라들 간 분쟁과 전쟁의 역사가 수천년을 이어져온 지역이다. 일상적으로 겪는 폭격과 피해, 매일의 삶에서 분출되는 분노와 증오가 음악 하나로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너무 순진할 것이다.
그래도 이들이 들려준 음악은 너무도 강렬하게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웨스트 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는 큰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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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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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그 자체입니다. 이런사람들이 있어 우리 다음 다음 세대들은 살맛나는 장래가 있을거라고 생각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