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식 가공육 샤퀴트리, 고기·채소 등 함께 익힌‘퀴이트’
▶ 햄·소시지처럼 숙성시킨‘세쉬’, 크게 보면 두가지지만 모양 다양
경기 광주의‘프랑스구르메’ 건조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소시송. 먹음직스럽게 하얗게 변하고 있다. / 프랑스식 정통 샤퀴트리를 맛볼 수 있는 메종조의‘장봉 블랑’과‘필레 드 포흐’, ‘파테 엉 크루트’. <잇쎈틱 제공>
‘프랑스구르메’의 대표 메뉴 론조와 한우 프로슈토. <잇쎈틱 제공>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만든 파이 크러스트에 고기와 채소, 건과일 등을 갈아 만든 소를 채워 오븐에 구워 낸 메종조의 파테 엉 크후트. <잇쎈틱 제공>
학창시절 소풍 갈 때 엄마가 싸준 김밥에 콕 박혀 있는 한 줄의 햄은 김밥을 더욱 고급지게 했다. 도시락에 놓여 있던 노랗게 코팅된 계란옷 사이 핑크빛 소시지는 하루를 즐겁게 했다. 우리에게 햄은 일반적으로 먹는 돼지고기인 삼겹살과는 다른, 우리는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 햄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반찬으로 먹는 햄, 소시지 같은 것은 육가공품이라 불린다. 먹으면 맛있지만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우리 식탁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음식이다. 이런 건 일종의 ‘길티 플레저’다. 몸에 안 좋은 건 알지만 ‘한번쯤은 이렇게 먹어도 돼’라고 스스로 슬쩍 눈감아 주는, 바람 피듯 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괜한 죄의식 따위일랑 버리고 기꺼이 즐겨도 된다. 우리가 진짜 햄과 소시지를 먹어보지 않아서 생긴 오해일 뿐이니까. 아마 햄이란 이름의 첫경험이 우리를 잘못된 선입견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소시지와 햄을 알게 된다면 ‘육가공’이란 ‘공장에서 만들어진’ 보다는 ‘재탄생’의 의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입안의 행복감을, 죄의식 없이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에게 육가공품이란, 곧 ‘샤퀴트리(Charcuterie)’다. 샤퀴트리는 프랑스인의 식생활 그 자체다. 샤퀴트리는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심심찮게 들리기도 한다. 샤퀴트리는 ‘고기(chair)’와 ‘가공된(cuit)’이 합쳐진 말이다. 말 그대로 육가공품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단백질의 원천인 고기를 잘 보관해 먹으려고 소금 뿌려, 말리고, 숙성시킨 나름의 노하우가 축적된 방법이다.
샤퀴트리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테린(항아리에 넣어서 보존한 고기)과 파테(파이 크러스트에 고기와 채소 등을 갈아 만든 소를 채운 후 오븐에서 구운 요리)와 함께 익힌 샤퀴트리 퀴이트(charcuterie cuite), 그리고 장봉(훈연한 햄)과 소시송(소금에 절여 말린 소시지)처럼 건조 숙성과정을 거치는 샤퀴트리 세쉬(charcuterie seche)다. 프랑스 정통방식으로 샤퀴트리를 만드는 두 곳을 소개한다.
프랑스인이 만드는 프랑스식 정통 가공육
프랑스 파리 출신인 로무알드 피에터스(Romuald Pieters)는 결혼과 함께 아내의 나라 한국에 왔다. 우리가 식탁에 김치가 없으면 허전해하고, 김치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먹여보고 싶어 하듯, 피에터스 또한 프랑스의 솔푸드인 샤퀴트리를 한국인들에게 먹여보고 싶었다. 샤퀴트리 공방 ‘프랑스구르메’를 직접 차린 이유다.
조리법과 재료만 있으면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레스토랑과 달리 샤퀴트리는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고, 까다로운 위생조건까지 갖춰야 해 공방을 열기까지 매우 힘들었다는 후문. 한국 축산업의 까다로운 규정과 샤퀴트리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부족 등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프랑스 정통방식 그대로 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013년 문을 연 프랑스구르메의 규모는 330.58㎡(100평)에 이른다. 준비, 건조, 포장, 저장 등 전 단계를 별도의 공간에서 진행할 수 있다. 특히 건조실에는 5~6종류의 샤퀴트리 세쉬가 하얀 옷을 입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야 두 달 뒤 좋은 샤퀴트리를 맛볼 수 있으니 진정한 슬로우푸드라 할 수 있다. 지름 2~3cm의 얇은 소시송과 초리조(양념을 많이 한 소시지)는 한 달, 지름 6~7cm 정도 두께의 론조(돼지 통등심을 말린 햄)와 프로슈토(돼지고기 넓적다리를 말린 햄)는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
프랑스에서 샤퀴트리는 대부분 돼지고기를 쓴다. ‘한우 1+’ 등심으로 만든 한우 프로슈토도 있다. 돼지고기를 못 먹는 사람들에게 샤퀴트리에 대한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다. 원래 프로슈토는 이탈리아식 햄이지만 한국의 질 좋은 소고기를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아 한우 프로슈토를 따로 만들었다 한다. 햇빛에 비춰보면 등심의 살결에 얇으면서도 자유스럽게 뻗어있는 작은 마블링이 비춰져 육질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소고기 육포와 비슷한데, 육포와는 반대 방향의 결을 따라 얇게 썰었기 때문에 덜 질기고 씹을수록 향신료의 은은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경쾌한 쫄깃함도 좋다.
소시지와 베이컨은 샤퀴트리 세쉬에 비해 만드는 시간이 짧아 조리가 필요하다. 다만 취향에 따라 다양한 요리에 쓰일 수 있다. 한국에서 베이컨이라면 미국식으로 얇게 자른 베이컨을 떠올린다. 프랑스 베이컨은 3㎜ 정도의 두께로 잘라 고기의 육질이 더 잘 느껴지게 한다. 특히 염장을 하고 체리우드의 훈연실에서 훈제과정을 거친 후 타임과 로즈마리향을 더하는 방식으로 숙성하기 때문에 은은한 향이 일품이다. 이 프랑스식 베이컨을 잘게 잘라 볶아서 파스타에 넣으면 파스타에서도 남다른 풍미를 살릴 수 있어 요리 초보자도 멋들어진 한끼를 만들 수 있다.
집에서 간단히 프랑스식 상차림을 하고 싶다면 소시지를 구워보는 것도 좋다. 사용하는 고기와 향신료에 따라 맛과 질감이 달라 기호에 따라 골라먹기 좋다. 특히 치폴라타 소시지는 돼지고기 허벅지살과 부드러운 향신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온 가족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주한 프랑스인들에게 ‘고향의 맛’을 선사
서울 서초구 주택가에 위치한 프랑스 정통 음식점 메종조는 샤퀴트리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번 들른 이상 다음부터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이다. 조우람 메종조 대표의 샤퀴트리 탐험은 프랑스 보르도의 재래시장에서 시작됐다. 요리경력은 이미 충분했으나, 뭔가 색다른 도전을 해보려던 중 우연히 먹게 된 장봉 한 입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서툰 프랑스어로 편지를 써 샤퀴트리 가게에 일자리를 얻은 뒤 직접 정통방식의 샤퀴트리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프랑스에서 5년간 샤퀴트리 만들기에만 전념한 그는 장봉을 처음 맛 보았을 때의 감동, 그리고 스승에게 배운 샤퀴트리의 정신을 한국에서도 그대로 이어가고자 한다.
가게에 들어서면 진열 냉장고에 남자 성인 팔뚝만한 큰 핑크색 고기덩이가 눈에 띈다. 바로 장봉 블랑이다. 프랑스에서 조 대표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바로 그 녀석이다. 돼지 엉덩이살을 소금에 절이고, 말리고, 충분히 숙성시켜서 만든다. 메종조의 장봉 블랑 재료는 제주산 흑돼지다. 완전한 조리과정을 거치지 않고 숙성 뒤에 먹기 때문에 고기의 품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칫 좋지 않은 고기로 샤퀴트리를 만들면 공들여 숙성해봐야 공수표가 된다.
메종조는 15~20종류의 샤퀴트리를 만든다. 그 중 테린과 파테는 주어지는 재료에 따라 무한 변신이 가능하다. 파테 엉 크후트는 겉은 페이스트리로 싸고, 안에는 오리와 닭의 간 등을 갈아 넣어 부드러움을 살린 한편, 살코기를 더해 씹는 맛을 넣는다. 거기에 자두와 크렌베리 같은 건과일을 넣어 달콤한 맛까지 더해주니 한 입 배어 물면 입 안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벌어진다.
샤퀴트리는 모양도 다양하다. 그래서 먹어보지 않고 겉모습만으로는 절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비밀 같은 음식이기도 하다. 먹는 순간 ‘아, 이 맛이구나’하는, 비밀스러운 여운을 오래 남긴다. 꼭 익힌 고기를 먹어야 하는 분들은 파테와 테린으로 샤퀴트리에 입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올 초에 문 열었는데 이미 한국에 있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꼭 가야 할 음식점 중 한 곳이 됐다. 특히 돼지고기를 적당한 지방과 함께 끓여 잼처럼 부드럽게 빵에 발라먹는 스프레드인 리예트는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프랑스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다. 보르도산 와인 한잔에 리예트를 바른 바게트 빵 한 조각을 곁들인다면 프랑스인들이 왜 그 맛을 그토록 그리워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시간의 가치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힘든 시간은 어느 때보다 느리고, 즐거운 일은 며칠조차 눈 깜짝할새 지나간다. 염지하고 튼튼한 옷을 입힌 후 온도와 습도만을 유지한 채 묵묵히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게 샤퀴트리다. 들어갈 때는 생고기였던 것이 나올 때는 각자 다른 빛깔과 맛을 가진, 멋진 먹을거리도 다시 태어난다. 숙성이 길수록 준비 과정의 작은 실수도 맛의 운명을 좌우한다. 자연스레 재료를 대하는 자세 또한 겸허해야만 한다. 음식이란 배를 채우는 과정일수도 있지만 자연의 어우러짐을 미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하다. 재료와 시간에 대한 겸손함, 만드는 이의 정성, 이것들이 버무려져 재탄생의 기쁜 순간을 맞이하게 하는 시간의 음식은 국경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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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드 샘플·박은선 잇쎈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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