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파도처럼 닥쳐오는 국제문제들 (계속)
공산권진영의 가장 심각한 균열은 쏘련과 중공간에 생겼다. 쏘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가끔 유화전략을 썼었으나 중공의 모택동은 비공산국가들과 모든 문제들에 타협하기를 거부하였었다. 크고 작은 문제로 중공과 티걱대걱해오던 쏘련은 1960년에 쏘련의 기술원조단을 중공에서 철수시켜 버리더니 1962년에 중공이 국경분쟁으로 인도와 전쟁을 시작하자 쏘련은 인도편을 들었었다. 쏘련이 Cuba 에서 missile 을 철수하자 중공은 쏘련을 “종이호랑이” 라고 비아냥 거렸었고 쏘련은 전쟁만으로 세계를 공산화 시킬수는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였 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쏘련과 중공의 불화는 더욱 심각하게 계속되고 있다.
1963년 6월에 JFK 는 군비경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보다 50여년전에 Wilson 대통령은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 보자는 원대한 포부를 발표했었 었다. JFK 는 Wilson 보다는 훨씬 더 겸호하게 만일 세계에서 이념적 차이를 없앨수 없는 것이라면 최소한 안전하게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질수 있도록 해보자고 제안 하였었다.
그해 7월에 미영쏘 3국은 외계, 대기권, 수중에서 핵실험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는데 지하실험은 계속할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미 제조되어 보관중인 핵무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다소 어정쩡한 조약이었었다. 미국 상원은 이 핵실험금지조약을 JFK가 암살되기 두어달반전인 1963년 9월 4일에 80대 19표로 비준하였었다. 이 핵실험금지조약을 백여개국 이상이 조인하였 었다고 한다. 그무렵 조금전에 핵폭발에 성공한 불란서와 그후 곧 핵폭발을 하게되는 중공은 이 조약을 조인하지 않았었다.
국제정치에는 아직은 대학원 2년차 학생이었다고 볼수있는 JFK 는 첫학년때에 Cuba missile 과목과 핵실험금지조약 과목의 시험을 비교적 잘 치루웠다고 생각하면서 국제정치라는 전공은 다소 위험이 있드라도 조금 용감하고 과감한 방법으로 준비하면 좋은 결과를 얻게되더라는 전략으로 월남전쟁과목 시험을 치루게 된다. 그러나 JFK 는 한가지 공부방법이 항상 통하는 것도 아니고 국제정치라는 과목이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과목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1954년의 Geneva 평화협정에는 월남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서 1956년 7월에 총선거를 치루게 되어 있었다. 당시 남부월남을 통치하고 있었던 Ngo Dinh Diem 대통령은 만일 총선거를 하게 되면 자신이 패배하게 되어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총선거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자 이었었다. 그는 중국의 장개석과 똑같은 이유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두사람이 공산주의 확대를 방지해줄 반공주의자들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지하였었다. 두사람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못한 독재자들이 었다는 것은 반공주의자라는것 보다는 중요하지 않았었다.
독재자 Ngo 대통령의 통일을 위한 총선거부로 시작되는 월남내전
Ngo 대통령이 총선실시를 거부한후 곧이어 월남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게릴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엄청난 액수의 물자와 자금을 월남에 공급해오고 있던 미국은 월남군의 훈련을 위해서 군사고문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 Ngo 대통령 반대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단결하여 NLF (National Liberation Front, 국민해방전선) 를 조직하여 Ngo 정권을 타도하고 월남을 통일시킬 목적으로 게릴라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JFK 는 이미 Eisenhower 때부터 시작된 원남의 지원을 계속하였다.
NLF 의 게릴라전쟁이 점점 왕성해지자 미군고문들의 숫자도 1만6천명으로 늘어났다. Johnson 부통령과 미군부가 월남에 더 큰 병력을 파병하자고 주장하였으나 JFK 는 병력투입의 확대를 자제하고 있었다.
미국의 고문들은 Ngo 대통령에게 개혁을 단행하고 민심에 귀를 기우리라고 조언하였 으나 Ngo 대통령은 개혁대신에 탄압을 계속하였고 불교도들이 집단시위를 감행하자 군대들이 잔혹하게 그들에게 총격을 하였다. 여러명의 불교승려들이 공개적으로 분신자살을 하며 항의하자 것잡을수 없는 국민시위가 확산되어갔고 JFK 는 Ngo 정권이 더 이상 존속할수 없는것임을 알게 되었다.
1963년 11월 2일에 미국의 묵인아래 군사정변이 일어나 정권이 전복되고 Ngo 대통령은 살해되었다. 월남의 정세는 하루가 바쁘게 악화되어가고 있었으나 후속 전략을 집행해볼 겨를도 없이 JFK 자신도 11월 22일에 Dallas 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월남상태는 갈수록 악화일로로 가게된다..
JFK 의 국내정치
것잡을 틈도 없이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문제로 곤욕을 치루고 있던 JFK 가 국내정치는 잘 하였을가? JFK 의 성적표에는 A학점과 C학점이 섞여있던 것이었지만 평균점수는 “우”편에 가까웠었다고 평가할수 있다고 생각된다. JFK 는 젊음, 낙관, 희망 등을 상징했었다고 볼수 있으며 완전히 이루어 놓은 “업적”이 많았었다기 보다는 년만한 Eisenhower 대통령치하에서 다소 공화당적, 보수적으로 돌아섰던 국정의 방향을 FDR 식의 New Deal 적 방향으로 돌려가고 있었었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그는 흑인들의 지위향상과 민권보호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서 그를 승계한 Lyndon B. Johnson 대통령시대에 많은 결실이된 씨앗을 뿌려 놓았었다고도 말할수 있을것 같다.
하원, 상원의원으로 일해오던 동안에 별로 탁월한 의정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를 받었던 JFK 는 아주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에도 당선되었던 까닭에 국민들로부터 성분이 분명한 정책의 위임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국회는 공화당과 정략적으로 손을 잡은 남부 출신 보수적 민주당의원들이 많아서 JFK 에게 별로 우호적이 아니었었다. 취임 초기에 JFK 가 구상했던 정책들에는 FDR 의 New Deal 적인 “진보적”인 것들이 있어서 그는 국내정치에서도 다소의 험로를 경험하게 된다. .
JFK 가 초기에 구상하였으나 실행해보지 못한 몇가지의 정책을 얘기해 보기로 하자. 1961년에 발표한 국내정책들을 JFK 자신은 “New Frontier” 라고 불렀으나 실은 그 대부분이 FDR 의 New Deal 정책의 연속이었다고 볼수 있는 성분의 것들이었다. 그는 불경기를 예방하고 경제성장률이 높아 지도록하여 미국이 다시 번영해 지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JFK 의 국회는 대공황에 지쳐서 “말씀만 하십시요” 라면서 FDR 이 제안한 법률들을 즉각 즉각 통과시켜주던 협조적인 국회가 아니었었다. 초장부터 그의 입법제안은 난관에 부딛치기 시작하였다.
JFK 는 지역별로, 주별로 차이가 심했던 교육수준의 평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획기적인 제안을 하였다. 그는 여러주의 공립학교 건설과 교사들의 봉급인상을 위해서 26억불을, 도움이 필요한 대학생들의 학자금으로 30억불등 총 56억불의 예산을 짜줄것을 요청하였다. 상원은 JFK 의 예산을 통과시켰으나 천주교 지도자들은 그예산이 천주교 사립학교들에게도 쓰여질수 있도록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신이 천주교인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JFK 는 천주교측 주장에 반대하였다. 천주교계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공화당의원들과 합세하여 JFK 의 교육개혁예산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같은 이유로 유사한 예산은 1962년에도 통과되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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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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