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일본을 방문했다. 낮에는 관광을 하고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TV를 켜면 연일, 끊임없이 한반도 관련 뉴스가 나왔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문재인, 아베, 리커창의 얼굴들이 보였다. 일본어를 모르니 화면에 나오는 얼굴들과 자막의 한자들을 토대로 내용을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문맹’의 한계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북한 비핵화 선언에 따른 향후 정세에 일본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사실이었다. 2018년 봄 ‘한반도’는 지구촌 최대이슈로 떠올랐다.
4월 한반도를 들뜨게 했던 봄기운은 3주 사이에 주춤해졌다. 봄의 불청객, 꽃샘바람이 찾아들었다. 65년 정전의 땅, 한반도에 금방이라도 평화가 정착할 듯 부풀었던 기대는 ‘현실’이라는 찬바람을 맞았다. 북한이 만면에 가득하던 웃음기를 거두고 태도를 바꾸었다. 남북고위급 회담을 일방적으로 무기한 연기하더니, 6월 북미정상회담 재고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북한의 화해 제스처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한국의 보수진영은 당장 ‘거 봐라’ 하는 반응이다. “그러면 그렇지, 그만큼 속고도 또 속는 가.” - 이념과 체제로 분단된 후 70여년 뿌리내린 불신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남북관계에서 가장 높은 벽, 상호불신이라는 현실이다.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2대 요인은 사랑과 두려움이라고 한다.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뭔가를 한다면 필경 그것은 사랑 때문이거나 두려움 때문이다.
북한이라는 정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필시 두려움일 것이다. 극동의 작은 반도 반쪽 땅에서 섬처럼 버텨온 극빈국, 북한의 가장 큰 두려움은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일 것이다. 핵무기 개발, 예의 벼랑 끝 전술, 말 뒤집고 태도 바꾸기 … 북한이 이제껏 보여 온 행동들은 근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신뢰를 깎아먹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 ‘양치기 소년’이 되었다.
미국이 북한의 체제 안전보장을 뒤로 하고 핵폐기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배경 역시 북한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북한이 나중에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 모르니 우선 비핵화를 하면 나중에 보상하겠다는 ‘선 비핵화, 후 보상’ 입장이다.
미국의 이런 압박에 북한이 발끈하면서 지난 16일 남북고위급 회담 전격취소에 더해 북미정상회담 재고까지 운운하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전략적 기선잡기 신경전일 수도 있고, 북한 역시 미국에 대한 불신이 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리비아의 가다피가 핵 포기 후 어떻게 되었는지 김정은이 모를 리가 없다.
모든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호신뢰의 산물이다. 서로 신뢰하면 관계는 오래 지속되고, 의심이 끼어들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신뢰 없는 관계는 개솔린 없는 자동차 같다는 말이 있다. 아무 데로도 가지를 못한다.
개인과 개인 관계에서 신뢰의 바탕이 상호이해나 사랑이라면 국가와 국가 관계에서 신뢰의 바탕은 상호이익이다. 국제관계에서 무조건적 신뢰란 있을 수 없다. 이익 추구를 위해 상호협력 할 뿐이다. 양측이 교류하면서 상대의 이익을 해치지 않고 협력하는 동안 신뢰는 서서히 형성된다.
문제는 남북이 혹은 북미가 그 초입까지나마 도달할 ‘개솔린’이 있는 가이다. 문 대통령은 원하던 대로 남북관계의 운전대를 잡기는 했지만, 이 자동차가 어디로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문 대통령의 말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상황이다. 22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입장을 설명하랴, 북한 측에 미국의 입장을 전하랴 문 대통령은 중재자의 역할로 바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어떤 ‘선의’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해와 이해가 팽팽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호 이익의 균형으로써만 성취 가능하다.
북한이 완전한 핵포기로 얻는 대가는 체제의 안전보장과 경제적 발전이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영구적 비핵화로 말썽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가 한국, 우리 민족에게 갖는 의미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도 노리는 것이 없지 않다.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고, 일본은 핵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북한 경제개발에 참여하려 할 것이다.
각국이 자국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주시할 한반도 비핵화의 일차관문, 북미정상회담은 성공할 것인가. 회담 실패는 누구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국내 스캔들을 잠재우고 중간선거에서 승리할 국면전환용 업적이 필요하고, 김정은은 제제완화와 체제보장이 절실히 필요하다. 각자 이익만 바라본다면 상호협력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라도 ‘한반도 평화’라는 자동차가 목적지로 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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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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