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계속)
Nasser 는 Nile 강의 홍수를 방지하고 물을 농수로 쓸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청난 규모의 Aswan dam 을 건설 하고자 하였었다. 당초에는 미국이 dam 건설을 해줄것으로 얘기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Nasser 의 반 Israel 적인 정책과 언동, 제3세계의 지도자가 되려는듯한 독자적인 언행, 이런 기회를 타서 중동지역에 발판을 마련해 보고자 했던 쏘련과의 우호적인 관계등이 이유가 되어서 미국은 dam 건설후원을 거부하였고 결국은 쏘련이 Aswan dam 을 건설해 주었다. 그후 오랫동안 미국과 Egypt 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었고 Israel 의 입지는 몹씨 좁아졌었다.
또 미국은 쏘련이 드디어 중동에도 공산화 흉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중동에서 차츰 영향력을 잃어가고 중동이 공산화가될 위험성이 커져가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1957년에 Eisenhower Doctrine 이라는 중동정책을 발표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무력침공을 우려하는 중동국가가 원조를 요청하면 무력지원을 할것이며 경제발전도 후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Eisenhower Doctrine 은 애당초 미국의 정세 오판으로 만들어진 정책으로써 두가지의 헛점이 있었었다. 첫째는 미국이 신경과민적으로 우려했던것 같은 중동에 대한 국제공산화 흉모는 없었었고 둘째로 중동의 불안은 중동 여러나라 정권의 취약성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중동의 불안은 외환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우에 있었던 것인데 미국의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으로 처방약도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이었다.
Syria 정부는 자생적으로 좌경화하기 시작하였고 Jordan 에서는 계속된 폭동들이 Hussein 왕을 위협하였으며 1957년 5월에는 Lebanon 에 국내전쟁이 자생적으로 일어났 으며 그 두달후 Iraq 에서 국왕과 총리를 살해한 군부반란이 일어나 정국이 불안해지자 공산분자들이 집권을 시도했던적이 있었던것 등등의 일이었다.
Lebanon 에서는 공산주의, 자본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에서 내분이 시작된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Islam 교간의 불화가 내분의 원인이었는데 미국은 친미적인 Chamoun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해병 7천명을 투입 하며 핵무기 까지 보냈었으나 정부를 보호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만 낸채로 결국은 해병을 철수하고 말았었다. Hussein 왕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였던 영국도 폭동들이 진압되자 철군하였었다.
다만 Eisenhower Doctrine 은 2차 대전후에 Greece 가 공산화의 위협을 받았을때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Greece 와 주변국가들의 공산화를 방지했던것과 같은 효과는 있었을것으로 생각된다.
영불 소유의 Suez 운하를 국유화하는 Nasser 와 Israel 의 Egypt 침공
부패한 국왕를 퇴위시키고 새로 건국된 공화국의 대통령에 선출된 Egypt 의 Nasser 는 중동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었으며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지킴으로써 중동의 새 영도자 격이된 Nasser 은 반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영국과 불란서의 합작회사가 운영해오던 Suez 운하를 몰수하여 국유화 해버렸다.
드디어 Arab 국가들의 빈번한 국경침범과 Israel 을 파멸 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아오던 Israel 이 1957년 10월 29일에 Egypt 를 침공하였다.
그 이틀후에는 영국과 불란서가 Egypt 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Suez 운하의 북부 3분지1 을 점령하였고 Israel 은 Sinai 반도를 건너서 본격적으로 Egypt 를 침공하였다. 마침 Hungary 국민혁명을 tank 로 무자비하게 진압 시킨것으로 세계의 규탄을 받고있던 쏘련은 비난의 화살을 벗어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Khrushchev 는 영국과 불란서를 침략국가 들 이라고 규탄하면서 Arab 의 우방인 쏘련이 Egypt 에 공군과 해군을 보내서 도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London 과 Paris에 미사일을 발사할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제3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수도 있는 위기가 발생한 것이었다.
미국은 쏘련의 위협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미국과 한마디의 사전 상의가 없이 영국과 불란서가 Egypt 를 침공한것에 대하여 Ike 와 Dulles 는 몹씨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쏘련과의 정면대립으로 3차전이 시작될수도 있는것을 우려 하였었다. 드디어 Ike 는 침략전쟁을 즉시 중단하고 점령군들은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UN 의 결의안에 쏘련과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쏘련의 위협을 받고 미국조차 반대하자 영국, 불란서, Israel 은 UN 의 결의를 따를수 밖에 없었다. 1958년 3월에 Columbia, Denmark, India, Norway, Sweden 등의 나라가 참가한 UN 군이 Gaza 에 파견되어 정전을 감시하였다.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이무렵 UN 이 쏘련군이 Hungary 에서 철군할것을 요구한 결의안은 쏘련에 의해서 묵살되어 버렸었다.
대만과 동독
중동에서 이처럼 복잡한 국제관계가 전개되고 있는 동안인 1958년 8월에 중공은 중국 본토 연안에 있었지만 장개석정부가 점유하고 있던 금문도와 마조도를 연일 포격하기 시작 하였다. Ike 는 만일 중공이 대만을 침공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두 섬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미국이 무력으로 개입하겠다고 공언하고 그의 진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듯이 막강한 미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파송하였었다.
1958년 11월에 쏘련은 갑자기 서부 Berlin 을 점유하고 있던 미영불 3국에게 Berlin 에서 6개월 이내에 철수하고 서부 Berlin 을 “자유시”로 만들것을 요구하였다. 만일 서방국들이 쏘련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쏘련은 동부 Berlin 에서 철수하고 동독과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동부 Berlin 의 통치권을 동독에게 넘길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독이 서방국가들의 한바다속의 외딴섬같은 서부 Berlin 의 통로를 완전히 봉쇄하겠다는 위협이었었다. 서방국들은 쏘련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나 쏘련도 위협을 이때에 실행하지는 않았었다.
Rocket, ICBM, 인공위성
요즈음처럼 김정은군 조차도 대륙간탄도탄 (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과 잠수함발사탄도탄 (SLBM: 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 을 만들었다고 위협 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missile 이나 그 전신인 rocket 쯤은 아이들 장난감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기가 쉽지만 100여년전쯤에는 rocket 라는 “개념”을 처음 발상한 사람을 “참 아까운 사람이 너무 연구에 몰두하더니만 돌아갔네!” 라고 측은하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현대의 rocket 는 연료를 태우는 engine 으로 추진되지만 “최초”의 rocket 는 화약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면 또 “화약”은 누구가 최초에 발명 하였을까 언제쯤 전에?
중국사람들이 인류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여 불꽃놀이를 하다가 폭죽이라는 원시적인 rocket 까지는 이미 수천년전에 만들었었는데 “이태백이가 이미 갔다왔다더라”는 헛소문을 믿었던 탓이었던지 달나라를 가볼 생각은 하지않은채로 설날에 폭죽놀이만을 계속 하다가 결국은 미국에게 달나라 선착권을 내주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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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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