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반까지의 흑인항의운동은 비조직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와같은 방법은 백인들에게 더 잔인한 수단으로 흑인들을 “진압”시킬 구실만 제공하기 일수이었다. King 목사는 장기적으로 흑인차별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흑인들이 끓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고 도리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항의해야 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백인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기독교 적인 인내와 용서를 바탕으로 Gandhi 의 평화적 불복종방법을 쓰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뻐스에 불을 질르고 경찰의 폭행에 폭력으로 대항하는것은 백인들에게 흑인차별의 구실만 제공해줄 뿐이라고 역설하였다.
King 목사는 Montgomery 의 흑인들에게 뻐스 승차를 전면 거부하자고 설득하고 때로는 애원하였다. 이 호소에 점차 호응하기 시작한 흑인들은 몇마일을 걸어서 출퇴근 하는 사람, car pool 을 조직하여 합승하는 사람, 양심에 가책을 받은 이웃 백인들의 도움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 더러는 출퇴근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여 급료를 못받게 되는 사람 등등을 다 포함하여 많은 흑인들이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이 승차거부 운동이 381일간 계속되자 뻐스회사는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법원은 뻐스의 인종차별은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뻐스회사는 인종차별을 완전히 폐지하였고 흑인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굴욕적이었던 제도를 바꾸어 놓았다. King 목사는 이 평화적 불복종운동을 “자유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새 도로의 대약진” 이라고 불렀다. 그후에 King 목사의 뒤를 딸아 행군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갔다.
1960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흑인들이 King 목사의 방법을 일상생활에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데 쓰기 시작하였었다. 그들은 식당에서 흑인들의 착석이 금지된 장소에들 앉아서 식사를 했고 흑인이 금지 되었던 수영장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였으며 백인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경찰과 싸우지 않았으며 아무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았고 법과 권리를 아는 점잖은 시민처럼 평화스럽게 행동하였었다.
Ike 행정부도 뒤늦게나마 점차 더 적극적으로 민권옹호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57년 8월에 Ike 는 남북전쟁후 처음으로 민권법 하나를 입법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법은 경천동지할 내용을 담았던것은 아니고 단지 투표권행사를 거부당한 흑인들을 위해서 소송를 제기할수있는 권한을 법무부에게 주는 것이었다.
당연한 상식적인일에 대한 입법 이 었지만 동네 한복판에서 백인 불량배들에게 몰매를 맞아도 말려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사회에서 살고있던 흑인들에게는 대단한 인권의 향상이었었다. 그러나 이 법의 역사적 중요성은 법의 내용보다는 이 법이 양당의 합의로 입법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는 민주, 공화 양당간에 이념적 차이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각당내 에서는 출신 지역이 남부이냐 북부이냐에 따라 생리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상원에서는 한 상원의원이 어떤 입법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경우에 무절제한 발언과 무제한적으로 강단을 독점하는 filibuster 수법이 쓰여지는 환경에서 이 민권법이 통과되었 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업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었다. 이 법이 입법되는 데에는 민주당 상원 원내촘무이었던 Texas 의 Lyndon B. Johnson 상원의원의 폭넓은 영도력이 필수적이었 었다. 어려운 첫걸음을 내디딘 국회는 1960년에 흑인의 투표권을 한층 더 강하게 보호하는 민권법을 양당의 합의로 통과시켰다.
마치 역사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기라도 하려는듯이 정강을 확정하고 대통령후보의 공천을 위해서 소집된 1960년 양당의 전당대회들에서는 인종차별과 분리를 반대한다는 정강들이 채택되었었다. 미국역사 조류의 방향 전환점에서 흑인들 자신들이 중요한 기수역할을 한것이었었다.
미국의 국내정치가 집권당의 변동으로 다소 보수화되기 시작하였으나 인종차별등의 제도적인 불평등에 눈을 뜨기 시작한 흑인들의 민권운동도 차츰 더 강하게 태동하기 시작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국제관계는 어떠했었는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은 이제 세계 최강국, 제일 중요국가로 자리가 잡혀서 미국의 국내사정이 바깥 세계에도 영향을 주고 국제정세의 변화도 미국의 국내정치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상관관계가 깊은 나라가 되어 있었다.
공산주의와 자유자본주의간의 대립은 점차 심각해져 가고 있는 와중에서도 Ike 는 특별한 외교적 업적이 없이 대통령 첫임기를 보내고 있었다. Ike 의 임기초기에 Dulles 국무장관은 대공산주의 강경정책을 호언했었으나 첫임기말쯤이 되어서는 공산주의 확산의 저지와 공존으로 정책이 바뀌었으며 장개석이 중국본토를 되찾아야 할것이라는 얘기도 수그러 들었었다.
한때는 유사시에 대공산권 맹공격을 할것이며 철의 장막 뒤에 억압되어있는 공산국가 들을 해방해야 할것이라고 Dulles 장관이 호언했던적도 있었지만 막상 1953년에 동백림과 동독에서 노동자들의 반항을 동독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진압하였으나 전쟁까지할 생각은 없었던 서방측은 속수무책으로 방관할수 밖에 없었다. 1956년 10월에 Hungary 에서 공산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국민혁명을 쏘련이 tank 와 군대로써 무자비하게 진압해 버렸을 때에도 서방측은 속수무책이었으며 미국은 폭정을 탈주해 나온 망명자들이나 난민들의 구호하는 수준을 그게 넘지 못하고 있었었다.
결국은 국제정치의 초점이 “ 멸공, 필승” 이라는 위협적 자세에서 “확산저지, 공존” 이라는 다소 유화적인 자세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Ike 의 잔여 임기중에 발생한 여러가지의 국제문제들은 자본 대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대립이 늘 바탕에 깔려있었는데 그런 일들이 국제관계에 어떠한 영향들을 주었는지 앞으로 몇회에 걸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중동
중동에는 세계 최대의 석유가 집중적으로 매장되어있는데 그지역은 세계를 멸망시킬 제3차 세계대전의 화약고가 될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많이있다. 중동은 석유이권과 미국의 거의 “맹목적”으로도 보이는 친 Israel 정책을 혐오하는 Islam 교를 믿는 Arab 국가들의 반미감정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의 hot potato 가 되어오고 있다. 꼭 먹기는 해야 되겠는데 너무 뜨거워서 양손으로 번갈아 바꿔 쥐어보지만 이 감자는 식을줄을 모르고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것 같은 형국이다. 우리 세대에만 해도 중동의 화약고가 폭발할것 같았던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벌써 여러번 있었었다.
Hungary 의 반공국민봉기가 쏘련군의 탱크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던 해인 1956년에 Egypt 에서는 Gamal Abdel Nasser 이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었다. 그는 영국과 불란서의 허수아비 노릇을 해오고 있던 Farouk 국왕을 군사혁명으로 퇴위시킨 인물이었다. Nasser 는 여러 중동지역의 지도자들과 동맹하여 Israel 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멸망시킬것 이라고 공언하면서 Israel 에 척후병들을 계속 보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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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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