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서랍 정리를 하면서 사진 한장을 찾아냈다. 십오년 전 내가 귀국을 했을 때 우리 형제들과 그들의 배우자를 합쳐 여섯명이 제주도 여행을 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우리들은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지나간 몇년의 세월 동안 네명이 유명을 달리한 사실을 깨닫고 새삼 허무함이 가슴을 쳤다. 사실 지난 부활절 아침에 나는 큰 언니로부터 작은 언니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었다. 이상하게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별로 슬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동안 작은 언니는 몇년을 병치레를 했으며 그녀가 여태껏 88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놀라운 기적으로만 여겨졌다. 사실 그녀는 열여덟살인가에 병을 얻어 죽을 고비만 수차례 겪어왔다. 처음엔 폐병으로 시작해서 연주창과 나중에는 뇌막염까지 걸려 어머니는 몇번이나 수의까지 지어놓으시고 몇몇해를 마음 졸이며 사셨다.
처음에 작은 언니가 병을 얻은 것은 내 이복 오빠가 자신의 집에서 동맥을 잘라 자살한 것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그 당시 이복 오빠는 종전 후 일본 여자였던 올캐가 아이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을 때부터 우울증이 찾아와 몇번 자살을 시도했을 때였다.
오빠는 우리 과수원의 창고에서 목 맨 것을 머슴들이 발견해서 그 자살은 미수로 그쳤지만 그후부터 엄마는 오빠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열사람이 도둑 한 놈을 지키지 못한다는 옛말처럼 결국 오빠는 동맥을 끊어 자살을 했고, 그것을 발견했던 작은 언니는 그 자리에서 혼절한 것을 사람들이 발견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때부터 작은 언니의 병이 생겼다고 식구들은 믿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큰 오빠의 귀신이 붙었다고 사람들은 수근댔다.
어쨌던 작은 언니는 그 무렵부터 시름시름 병이 나서 처음엔 폐병이 생겨 그 당시 새로나온 그 비싼 페니실린을 먹고 폐병은 나았지만 그것이 목으로 가서 연주창이라는 고약한 병으로 몇년을 앓았다. 그 시절 작은 언니는 늘 창가에 앉아 ‘오!데니 보이’며 ‘바위 고개’ 같은 슬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느땐 남몰래 겨드랑이에서 고름을 짜내곤 하는 것을 나와 엄마는 보고도 못본채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던, 슬퍼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당시는 육이오 전쟁이 한창이던 때여서 쌀이 귀한 때라 작은 언니만 흰쌀밥을 먹이고 우리 식구들 모두가 깡보리밥을 먹을 때여서 철이 없던 나는 작은 언니가 부러워 나도 좀 아팠으면 흰 쌀밥을 먹을텐데 하고 샘을 냈던 적도 있다.
작은 언니는 장장 칠년을 앓다가 어느날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처음엔 잘 걷지도 못하고 비실비실했다. 나는 지금도 하얀 배꽃이 과수원을 수놓고 있을때 배밭으로 올라가는 그 오솔길을 작은 언니의 손을 잡고 비틀비틀 함께 올라가던 그 봄날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그때의 아련하던 추억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언니가 스물 댓살, 나는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현재의 남편을 만나 미국으로 오게 되고, 그동안 가끔 작은 언니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십수년이 지난 뒤였다. 처음 재회를 했을때 작은 언니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수술이 잘못되어서 다리 병신이 되었다고 언니는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정작 작은 언니와 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은 내가 한국에 나가 삼년을 살 때였다. 늘 한달에 한번꼴로 작은 언니 부부와 오빠와 올캐는 그때 청주에서 살고있던 나와 남편을 찾아왔다. 그들은 마치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우리 부부를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갔던 것 같다.
나는 그들이 오면 그들이 좋아하는 고기와 미국식 요리까지 곁들여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해서 대접했다. 밤이면 우리들은 노래방도 가서 목청껏 노래도 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돌아갈 때는 두둑한 용돈까지 챙겨 드렸다.
내가 한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다시 떠나는 날, 작은 언니도 울고 올캐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생전 표시도 잘하지 않는 무뚝뚝한 오빠도 눈물이 나는지 계속 눈만 껌뻑였다.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젠 제일 맏이인 큰 언니와 막내인 나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싸아!하고 회오리 바람이 지나간다. ‘누가 먼저 떠나고 나중 떠나지만 결국은 우리도 어느날 떠나가겠지. 이게 인생인가봐!’ 혼자 중얼거리며 문득 쳐다본 하늘이 오늘따라 유달리 새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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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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