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마다 형형색색 꽃들 만개 황홀 그 자체
메인분수 가든의 분수들.
미국인 사랑하는 명소 탑10 중 수목원으론 유일
4~5월 튤립.수선화 등 구근식물들의 봄꽃잔치
노천극장선 클래식 공연.온실에선 파이프 오르간 연주
380개 분수가 물 뿜어내는 메인분수가든 감탄 절로
이번 여행의 종점인 롱우드 가든에 도착했다.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미국의 명소 10위 안에 수목원으론 독보적인 존재로 선택된 곳이다.
방문객센터로 들어가니 안내 설명서가 몇 개국어로 비치돼있다. 한국어책자도 당당히 끼어있어 고맙고 반갑다. 한국어 표기라 읽는 즉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안내지도와 공원의 모든 정보와 역사가 주르륵 머리에 입력되니 너무 좋다.
이곳도 역시 한 30년 전쯤인가 애들을 데리고 와봤었다. 그때 인상적이었던 점이 처음 보는 다양한 꽃들과 식물이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는 것. 또 하나, 향나무인지 전나무인지를 사슴, 토끼. 곰 등으로 실물처럼 정교하게 다듬어놓은 걸 보고 감탄했던 생각이 난다.
비도 오고해서 의자에 앉아 한국어 팜플렛을 읽어봤다. 이 정원은 애초에 피어스(Pierce) 가문이 1700년에 퀘이커 윌리엄 펜(Quaker William Penn)으로부터 정원 부지를 샀던 게 시초였다. 피어스가 부지에 나무를 대거 심으면서부터는 피어스공원으로 알려졌고. 그런데 1800년대에 와서 수목원의 고목들이 목재용도로 마구 벌목됐단다.
그렇게 되자 듀퐁과 제너럴 모터스 회장이며 건축가인 피에르 듀퐁(Pierre S. Du Pont)씨가 지역을 개발, 피어스가의 전통을 되살려 나무를 집중 조림 육성해서 롱우드로 개명, 일반 공개를 시작했던 것.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1077에이커(132만평)의 거대한 정원이 탄생된 거였다.
그런데다 연간 80만 명의 방문객에 365일 공개라, 70여명의 직원들 외에 400여명의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수고가 크단다.
300여 년 전 지어진 피어스가문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저택은 피어스와 듀퐁의 집이었다가 박물관이 됐다. 천만송이 꽃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땄다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은 물론 세계 그 어떤 정원들보다도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걸로 쳐준단다.
책자를 보니 1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는 실내정원에서 동서양난들이 어우러진 난의 향연이다. 4월초에서 5월말까진 250,000개가 넘는 튤립, 수선화, 크로커스 등 구근식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봄꽃잔치다. 참나무들 밑에 오색 꽃 카펫을 깔아 놓은 듯 수십만 송이의 알뿌리들이 일시에 핀다니 얼마나 장관일까.
5월말에 시작해 9월초까지의 하이라이트론 분수축제다. 푸르른 초목들이 싱그러운 여름향기를 내뿜는데서 시원스레 분수들 춤 공연이 어우러진다니 스트레스가 다 증발하겠다. 9월 중순부터 11월말까지는 노랑, 주홍, 빨강의 울긋불긋한 단풍들로 가을의 정점이다. 오늘이야말로 가을낭만에 해당되는데 애석하게도 단풍색깔이 별로다. 한술 더 떠서 우천이니 하늘만 올려다볼 밖에 없다.
11월말부터 1월초까진 단연 크리스마스 축제다. 저마다 500,000여개의 오색전구들로 우아하고 화려한 별을 단 나무들의 변신이 볼만하겠다. 나무들이 꿈의 나래를 펼치는 셈이겠다. 그 외에 수많은 포인세티아들로 치장하니 완전 동화속의 나라랑 진배없을 거고. 그뿐인가.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아이스스케이팅 쇼까지 벌어진다단다. 이른바 만화영화 ‘겨울왕국(Frozen)’의 재탄생이겠다. 이래서 사람들이 롱우드 가든을 계절대로 와본다고 하나보다.
안내책자엔 볼거리를 대충 27군데로 구분해놓았다. 그중 듀퐁이 가장 좋아했다는 이탈리안 워터(Water)가든과 토피어리 가든이 볼만하겠다. 1800년대 피어스가 심었던 주목을 ‘가위손’의 에드워드가 다녀갔는지 재미있게 트림해놓아 인기란다. 또 1930년에 세워졌다는 장미 가든도 그지없이 아름답단다. 종탑에 있는 62개의 종으로 매시간 종악(鐘樂)을 울리는 차임스 타워(Chimes Tower)와 폭포가 장관인 힐사이드(Hillside)가든도 명소란다. 6,300평의 실험 가든에선 가정정원 조성에 안성맞춤인 아이디어를 선사한단다.
1913년에 지어진 노천극장에선 클래식음악회가 열리고 온실에선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도 한다는데 오늘은 프로그램이 없다. 봄이라면 작약정원도 둘러보고 낙우송 길과 흰색과 보라색의 등나무 꽃들이 늘어진 꽃 대궐 밑을 걸어보면 천상세계 같으련만...
볼 곳과 걸어볼 곳이 많이 나와 있지만 하루에 답사하긴 어렵겠다. 더해 날씨도 안 받혀주고. 옛 기억을 더듬어 비와 상관없는 실내정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가에 두 줄로 늘어선 나무들이 로맨틱한데 이름이 흰 무궁화꽃길이라니 반갑다. 지금이야 꽃 한 송이 없지만 흰 꽃이 다닥다닥 피었을 그림 같을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화안해진다. 우산만으론 들이치는 비에 속수무책이지만 낙엽 떨어진 호젓한 길은 운치가 짙다. 고즈넉이 비를 받아들이는 오솔길을 거닐면서, 가슴 속으론 낭만이 현현(顯現)하게 밀물져 온다.
길 왼쪽으로 좀 떨어진 곳, 나무 울타리 너머로 물줄기들이 허공으로 치솟고 있다. 호기심이 일어 급히 발길을 돌렸다. 380개의 분수가 분당 38,000리터의 물을 40m까지 뿜는 메인 분수가든(Main Fountain Garden)이다. 만 리터의 물을 담은 물의 눈(Eye Of Water)이란 저수지에서 위의 폭포와 이 메인분수까지 물을 공급한단다.
비와 분수는 어쩐지 조합이 어색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 형태로 물이 솟구치지 않고 물줄기가 커지다 작아지다 사방으로 확 휘어지기도 하니 멋지다. 예측 못한 순간, 간헐천이 땅 속에서 팡! 뜨거운 물줄기를 분출하듯이 높게 치솟을 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늘에 닿고 싶은 염원을 마음껏 허공에다 내쏘는 모양새다. 드라마틱해 짜릿하다.
세계 최대규모인 4에이커(약5700평)부지의 실내정원인 온실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국화향기로 잠시 어질어질하다. 눈앞에 꽃들은 너무 예쁘지만 인공적인 느낌이 강해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받은 듯싶어 꽃들에게 미안하다. 그런 제약을 묵묵히 감수하며 탐스럽고 화사하게 만개했으니 참 착한 국화들이다.
가을엔 이처럼 국화가 주인공이지만 받혀주는 조연들도 많다. 야자하우스, 장미하우스, 난 하우스, 바나나하우스, 고사리길, 아카시아길, 실내과수원길, 지중해정원, 열대식물정원에 선인장가든 까지. 연못가엔 대나무요, 물위엔 연꽃과 수련 외에 여러 수생식물들이다. 총 망라된 진귀한 꽃들과 식물을 한 곳에서 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당연히 사진가나 화가들의 선호 장소다. 곳곳의 벤치는 드로잉 하는 화가들, 위용을 뽐내는 카메라렌즈에 꽃을 담는 사진가들 차지다.
압권은 난생 처음 바나나 꽃을 본 거다. 예상보다 훨씬 특이하고 예쁘다. 꽃이 보라색, 빨강색 등 여러 가지라는데 자줏빛이다. 자주색껍질에 싸인 커다란 옥수수 비슷한 모양인데 옥수수와 반대로 아래를 향해 늘어졌다. 꽃잎이 한 겹 벗겨져 나비처럼 양쪽으로 펼쳐진 채 꽃 덩이가 달려있다. 목련꽃과 유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신비한 생김새만큼 꽃의 효능이 높아 음식재료와 고급 화장품의 원료로 각광받는다는 사실도 새로 터득한 정보다.
코너에 비치된 어린이 가든은 어른들도 동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분수가 작고 디자인과 주변 장식들이 귀엽고 앙증맞다. 펠리컨 동상도 있다. 전적으로 아이들의 시선과 감정, 호기심을 감안 조성해서 슬며시 미소가 인다.
워낙 넓고 시간도 빠듯해 꼼꼼히 감상할 여지가 없다. 몇 십 년 만에 다시 둘러 본 총평은 별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삼년마다 뭐든지, 특히 주변물이 확확 급변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허실(虛實)이 된지 오래란다. 미국에 상주하며 느끼기론 이삼십년이나 돼야 좀 변하는 슬로우 템포라 시각적으로 덜 혼란스러운데, 이 정원도 그렇다.
빗줄기는 심술쟁이처럼 사나워졌다. 그럼에도 분수와 꽃들과 함께해서인지 마음이 넉넉해지고 한결 맑아진 느낌이다.
아직도 보는 이 하나 없건만 씩씩한 모습으로 나를 배웅해주고 있는 분수에게 안녕을 고했다. ‘여행을 통해 가슴에 담는 감동은, 삶 가운데 언제나 행복한 순간을 되새김해주는 활력소가 된다.’는 말은 역시 정답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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