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두고 LA에서 시애틀로 전근 온 뒤 거의 19년이 흘렀다. 그 긴 세월이 당초 묵시적 약정기한이었던 3년만큼 빨리 지나가 허망하다. 새삼스럽지만, 시애틀에서 보낸 세월이 또 한 번 그렇게 바람처럼 흘러가버리면 나는 시애틀이 아니라 아예 지구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억누른다. 실제로 내가 95세까지 살 확률은 반반으로 나왔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나이, 신장, 체중, 음주·끽연 여부, 운동, 질병상황 따위를 기입하고 알아본 내 기대수명은 ‘매우 우수’했다. 앞으로 더 살 수 있는 기대치가 88세까지 75%, 95세까지 50%, 100세까지 25%였다. 미수(米壽, 88세)는 거의 따 놓은 당상이지만 95세는 장담 못 하고 내 동갑내기 4명 중 100세 전에 죽을 3명에 내가 낄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육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이애란의 ‘백세 시대’ 노래가 히트했다. “팔십세에 또 데리러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또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텐데 또 왔냐고 전해라…”로 이어진다. 마치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모두 상수(上壽, 100세)를 누릴 듯한 기분이지만, 착각이다.
당연하게도 근래 동창생 부음이 부쩍 잦아졌다.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내 동갑내기(1943년 생)는 줄잡아 ‘고작’ 18만2,000여명이다. 이들 중 4만5,000여명이 미수를 못 넘고 저 세상으로 갈 터이다. 한국에서 ‘인생 100세 시대’라는 말이 회자된 지 오래지만 실제로는 2015년에 출생한 아기들의 기대수명도 평균 82세(남자 79세, 여자 85.2세)에 불과하다.
사실은 한국의 세살 박이 아기들이 평균 82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진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환갑노인’이 귀했다. 요즘 환갑은 청춘이다. 3년 전의 한 노인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소위 연소 노인들(65~74세)중 55.3%가 자신을 노인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의 주관적 노인시작 연령은 71세로 법적 노인연령 기준인 65세보다 6년이 늦었다.
한국은 오래 사는 노인들이 크게 늘어나 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100세가 넘은 ‘센티내리언(centenarian)’은 드물다.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2015년 11월 현재 3,159명으로 인구 1만명 당 0.6명꼴이었다. 1980년 이후 매 10년마다 2배가량 늘어났다. 인구차이가 있지만 미국은 7만2,000여명, 일본은 6만1,000여명으로 한국보다 월등히 많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해 세계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인생 100세 시대를 실현할 나라로 꼽혔다. 영국 의학저널 ‘랜셋(Lancet)’은 오는 2030년 한국에서 태어날 아기들의 기대수명을 딸은 90.2세, 아들은 84.07살로 추정해 조사대상인 35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 중 각각 1위에 올렸다. 기대수명이 90세를 넘긴 건 한국여성이 사상최초이다.
랜셋은 한국인들의 평균수명이 괄목할 만큼 늘어나는 이유로 국민들의 비만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 고혈압 관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점, 높은 교육수준 및 영양상태, 경제?사회적 신분 향상, 낮은 교통사고 및 강력범죄율, 국민개보험 제도 등을 꼽았다. 식생활도 우수하다며 특히 다른 나라에 없는 김치가 비타민 A와 B를 풍부하게 공급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회적 유대관계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CNN이 사흘 전 보도했다. 센티내리언들이 유별나게 많은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섬의 티아나 마을 주민들은 가난하지만 낙천적이며 상부상조 정신이 몸에 배어있다고 전했다. LA타임스도 노화가 불만인 사람들은 이를 적극 포용하려는 사람들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엊그제 보도했다.
컴퓨터가 점쳐주는 기대수명이 믿을만한지 모르겠다. 긴 잔여수명을 편안히 살도록 노후 재정관리를 도와주겠다는 광고가 딸려 있기 때문이다. 기대수명 말고 ‘건강수명’도 있다.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기대수명보다 8.9년이 짧다. 그 기간엔 다치거나 병이 든 상태에서 산다는 뜻이다. 낙천적으로, 이웃과 어울려 사는 것이 건강수명을 늘리는 방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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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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