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올림픽은 지구촌 최대의 축제, 한바탕 거대한 놀이의 무대이다. 태초에 신에 불복종한 원죄의 대가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을 숙명으로 물려받은 인간은 그럼에도 중간 중간 작은 반역들을 꾀했다. 일상의 질서에 대한 불복종이다. 기존의 규율들을 잠시 정지시키고 다 함께 하나가 되어 놀이에 몰입하는 행위이다.
놀이의 집합체, 축제의 장에서 개인은 자유와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고, 집단은 일체감을 공고히 하는 오랜 전통을 우리는 이어 왔다. 절대권력 교황청을 웃음거리로 삼은 중세 유럽의 바보제, 양반을 조롱하며 박장대소한 우리의 탈춤, 남미의 카니발 등 동서고금 축제들의 공통점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놀이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본성을 일정 기간, 특정 공간에서 문화적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축제이고, 우리는 이를 대단히 좋아한다. 혹시 그것은 여유롭게 노닐며 살던 에덴동산,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본능적 희구일까?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눈부시게 펼쳐지는 개회식,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우리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고 호모 페스티부스(축제하는 인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평창 올림픽의 주제는 ‘하나 된 열정(Passion, Connected)‘이다. 열정은 방향성이 있다. 열정이 향하는 곳에 꿈이 있다.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은 꿈, 최고의 경지에 오르고 싶은 꿈이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을 열정에 불타게 했고, 그중 선택된 소수가 지금 평창에 모여 있다.
꿈은 도전을 동반한다. 도전은 앞을 가로막는 장벽을 뛰어넘는 일. 평창에 도착한 여러 선수들은 출전 그 자체로 기존의 장벽에 대한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 매미 바이니(18)는 흑인여성 최초로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가 되었다. 1924년 처음 개최된 이래 동계올림픽은 오래도록 백인들만의 잔치였다. 검은 피부의 여자선수로 동계올림픽에 출전함으로써 그는 흑인 등 유색인종 어린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다고 한다.
스키선수 거스 켄워시와 피겨스케이팅 선수 애담 리폰이 겨냥한 장벽은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다. 이들 선수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올림픽에 도전했다.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될 사실을 공개한 것은 동성애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받아들임으로써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평창의 꿈’ 중에는 미주 한인들에게 특별히 가슴에 와 닿는 꿈도 있다. 아빠의 아메리칸드림이 딸의 꿈으로 실현된 케이스이다. 스노보드의 천재로 유명한 남가주의 한인 2세 클로이 김(17) 이야기이다. 타임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30명’에 3년 연속 이름이 오른 클로이는 여자 하프파이프 종목 금메달 후보로 일찌감치 점쳐지고 있다. 평창 올림픽을 맞아 ESPN 잡지가 그를 표지 모델로 올리며 집중 조명했고, AFP 통신도 평창에서 주목할 선수 10명 중 하나로 그를 꼽았다.
아버지 김종진씨는 전형적인 한인이민 1세이다. 1982년 나이 26살에 편도 티켓 끊어 LA 공항에 내렸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현금 800달러와 영한사전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공부해서 엔지니어가 된 그는 막내딸이 눈밭에서 천부적 재능을 보이자 삶의 방향을 틀었다. 아이를 올림픽 선수 만드는 꿈에 올인 했고, 그 꿈을 이루었다.
‘하나 된 열정’의 평창은 하나가 되려는 열정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미국과 북한의 대표들이 올림픽 개회식에 함께 참석했고,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실질적 2인자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 한자리에 앉았다. 남북한 선수들이 ‘한반도’ 선수들로 함께 입장했고,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출전하며, 남북의 대표팀 선수들은 합동연습 중 농담을 주고받는다.
축제가 열어준 기회, 축제이니 가능한 제스처, 축제를 빌미로 하나 되려는 민족적 열정의 표현이다.
올림픽은 스포츠를 통해 차이를 극복하고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보다 평화롭고 보다 나은 세계 실현에 기여하려는 행사이다. 함께 어울려 같이 땀 흘리다 보면 마음의 벽들이 허물어지는 것이 스포츠 제전의 기능이다.
남북 간 한번의 만남이 북핵문제 해결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번의 만남이 한번으로 끝난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평창은 수많은 개개인의 꿈을 향한 행진. 그리고 한민족의 꿈을 향한 행진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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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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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실현 가능한 꿈이 있고 불가능한 꿈이 있는데 전 올림픽 이후가 걱정이 되요. 북한은 그들의 확실한 목표와 아젠다가 있어서 올림픽에 참여하고 이용하는것이지 정말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평화통일이 된다면 김정은 일가는 어찌 되나요? 국가적인 영웅으로 받들고 사나요? 그들이 잡아넣은 수만은 정치범들은 어떻게 하나요? 계속 감옥에 넣어두나요 아니면 그냥 풀어주나요? 자본주의를 모르는 수많은 북한 사람들은 어찌 먹여살리나요?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통일이라는 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