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즐겁지도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들이 있다. 되도록 피하려고 애쓰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 일에 집중하고 나면 오히려 그 일에 재미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번 주 배심원 출두가 내게 그런 경험이었다.
미국에서는 연간 3,000만 명 정도가 배심원 출두통지서를 받는다. 이들 중 ‘미국시민이라서 누리는 특권!’이라며 반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루하루가 톱니바퀴처럼 빡빡하게 돌아가는 삶에서 시간을 뭉툭 잡아먹는 ‘의무’가 뚝 떨어지면 대개는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배심원에서 빠지려는 갖가지 꼼수들이 가끔 신문에 화젯거리로 실린다.
예를 들면 뉴욕의 한 신문에 보도된 내용. 겁이 너무 많아서 배심원 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 알아보니 그는 외과 의사였다. 유엔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한 남성은 ‘영어를 못해서~’ 라고 둘러댔다. 5분마다 긴장을 풀지 않으면 못 견딘다고 주장한 남성은 하루 12시간 복잡한 뉴욕시를 누비는 택시기사였다. 핑계들이 먹혀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일상생활의 리듬을 깨는 이 불청객이 나라고 반가웠을 리가 없다. 출두통지를 받은 날 아침까지도 배심원 대기실에서 하루만 버티면 끝나리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출두한 지 두어 시간 만에 한 법정의 배심원단 후보로 이름이 불려 졌고, 해당 재판의 배심원을 뽑기 위한 질문과정이 이틀이나 계속되었다.
하루로 끝날 줄 알았던 법정출두가 다음날로 이어지자 마음을 비웠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배심원으로 뽑힐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재판종료까지 1주일 이상 법정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이다. 마음을 바꾸고 나니 그때까지 관심 없던 배심원 후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34명. 인적 구성이 참으로 다양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피부색. 새하얀 피부와 검은 피부를 양극으로 조금 더 짙고 조금 더 옅은 피부색들이 일련의 스펙트럼을 이루었다. 나이 역시 스물 즈음 대학생부터 70대 중반 은퇴자까지 다양했다. 성별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조금 많았고, 성적으로 그 중간도 있었다.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남편이 있는 남성이었다.
가장 다양한 것은 직업. UPS 트럭기사, 수학교사, 피아노 연주자, 가구회사 품질관리 직원, 접시 닦기, 변호사, 자동차 매캐닉, 보험회사 직원, 대학생, 온라인 사업자, 와인 수입업자, 은퇴 간호사, 가정주부 등. 거주지는 바닷가 부촌부터 가난한 이민자 밀집지역까지.
생활 무대로 볼 때 거의 마주칠 일 없을 사람들, 혹시 만났다면 가정부와 집주인의 관계로 만났음직한 사람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 수도 있을 사람들 … 학력과 경제력으로 나이로 인종으로 제각각인 사람들이 그 법정 안에서는 모두 한사람의 배심원으로 동등했다. 이름 대신 배심원 번호로 불리는 익명의 시민으로서 ‘일인, 일표’ 원칙이 예외 없이 적용되는 평등함이 그곳에 살아있었다.
자유와 평등을 가치로 건국된 민주주의 국가 미국에서 요즘 평등을 피부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가난해서, 유색인종이어서, 무슬림이어서, 여성이어서 … 차별받는 불평등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온다.
배심원 석에 앉아서 ‘평등’이라는 미국의 가치를 새롭게 확인하는 경험은 흥미로웠다. 19세기 프랑스의 귀족청년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을 여행하며 민주주의 현장에서 받은 신선한 감동이 떠올랐다. 유럽 귀족사회의 앙시앙 레짐(구 체제) 없는 신세계에서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자치적 참여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광경을 그는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었다.
미국은 그런 가치로 시작된 나라, 그렇게 유지되어야 할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감동이 밀려들었다. 돌아보면 아시안 여성으로서 배심원 석에 앉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다.
건국 당시 헌법이 보장한 자유와 평등은 백인남성들만의 몫이었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은 ‘시민’이 아니었다. 특히 아시안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민과 시민권 취득이 금지되었다. 이민문호가 열리고 시민권 취득이 자연스럽게 허용된 것은 1965년 개정이민법 이후이다. 법으로 허용되어도 현실로 정착하는 데는 또 시간이 걸렸다. 배심원은 언감생심.
한인사회의 원로 민병수 변호사에 의하면 배심원 석에 아시안 등 유색인종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80년 즈음이었다. 1948년 12월 미국에 도착한 그는 아시안이어서 시민권을 딸 수 없고, 집을 살 수 없고, 특정 대학을 갈 수 없던 차별의 시절들을 모두 거쳤다. 1975년 그가 변호사가 된 후에도 오랜 동안 배심원 석은 백인일색이었다. 내가 경험한 배심원 석의 다양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배심원 출두통지서를 좀 더 반갑게 맞아야 하겠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라는 헌법 정신을 맛보고 되새길 흔치 않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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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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