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아버님께서 소천 하셨다. 장수하셨으니 이제 편안 곳으로 잘 가셨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섭섭하고 그리운 마음을 접을 수 없다.
그 시대의 여느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버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초중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6.25 때는 20세의 나이로 육군 종합학교에서 단기교육 후 소위로 임관되자 바로 최전방에 소모 소위로 배치되셨다.
9. 28 수복 후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마시는 감격도 잠깐, 중공군에 밀려 남으로 후퇴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으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고 아버님은 회고하시곤 했다. 후에 육군 장교로 복무하시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교수로, 그 후엔 목사로 수고하셨다.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을 나누어 주신 아버님의 삶은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아버님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아 나의 인간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례 후 한국에서 방문하신 막내 작은 아버님 내외분과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아버님은 집안에서 도와주지 못해 늦은 나이에 고학하느라 우리 집에서 신세를 지셨다. 빠듯한 형편에도 우리 부모님께서 늘 따뜻하게 잘해주셨다고 이야기하신다. 어머님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격려 덕분에 공부를 계속할 용기를 얻었고 결국 건축학과 교수와 미술가가 되었다고 하신다. 건축사무실과 건축현장을 떠돌면서 학비를 벌어 가며 학교에 다니던 때의 일을 들려 주셨다.
삼촌이 노총각 시절, 결혼에 대해 고민하면서 어느 날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밤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옆 빈자리에 예쁜 아가씨가 오기를 고대하였으나 기대에 어긋나게 웬 노신사가 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으셨다. 내심 실망하면서 옆 자리를 비켜드리고 이런 저런 말을 걸어오시는 노신사의 말 상대를 해드렸다.
이른 새벽 대구 역에서 내린 후 떠나가시려는 노신사께 삼촌이 “해장국 한 그릇 잡숫고 가시죠!” 하면서 대접을 해드렸다. 식사 후 노신사께서는 집주소를 주시면서 “우리 시골에 한번 들러 주게나” 하셨다. 후에 막내 삼촌은 노신사가 계시는 시골을 찾아갔고,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차 여행 중 노신사께서는 만학도 삼촌의 구수한 인정에 마음이 무척 끌리셨다고 했다.
노신사의 딸, M양은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인상이 상냥하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았는데 특히 음악과 미술, 붓글씨에 일가견이 있었다. 번듯한 직장이 없던 삼촌은 즉각 구혼을 하지 못하고 만난 지 2년 후에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두 분은 집안의 도움을 별로 받을 수 없었기에 힘들게 살면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분들이 경제적으로 자리 잡기 전 좁은 집에 살 때 공교롭게도 내가 그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모님은 이민을 가시고 나는 학업을 중단할 수가 없었는데 마땅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어머님은 어려운 형편에도 새벽에 꼭 도시락을 두개씩 싸주셨다. 그 사랑과 도시락 덕분에 나는 학업을 마치고 미국에 올수 있었고 세월이 흘러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더니, 작은 아버님의 둘째 아들 즉 나의 사촌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근 3년을 같이 살며 USC 건축학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도 사촌동생은 공부를 잘 마치고 실무를 쌓고 부산 대학교 교수로 갈 수 있었다.
아버님 장례 후 나는 작은 아버님, 어머님께서 옛날에 나에게 잘 해주신 것을 감사드렸다. 작은 어머님은 오히려 당시 더 잘해주지 못해 아쉽다면서 아들을 잘 데리고 있어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의 사랑과 격려가 힘이 되어 아들이 잘 적응했다고 하셨다. 사촌 동생도 전화를 하며 생각할수록 지난날 나와 아내에게서 받은 사랑이 귀하다고 했다. 작은 아버님은 우리 집에 머무시면서 기념으로 주고가실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계신다.
아버님을 떠나 보내드리면서 인생은 짧음을 다시 느낀다. 아버님이랑 뒷산 삼각산에 올라가 가재를 잡고, 수박을 잘라 먹으며 책을 읽던 일이 엊그제 같고 꿈만 같이 느껴진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했는데, “인생은 짧고 인술은 길다”라는 말 이었다고 한다. 정과 사랑이 없는 예술이나 의술은 깊음도 진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돌아볼수록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러나 인정과 사랑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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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 내과의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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