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조용하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자연의 엄혹함을 한껏 과시하며 2018년의 서막이 열렸다. 새해 첫 주 동부에서는 100년만의 혹한과 폭설로 20여명이 사망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공항이 마비되었다. 신문사 선배의 아들은 지난 4일 아침 방콕으로 가기 위해 존 F 케네디 공항에 갔다가 팔자에도 없는 노숙자 생활을 했다. 이틀 반나절을 꼬박 공항에서 발이 묶여 있다가 6일 저녁에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새해 둘째 주,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 년만의 거센 폭우로 최소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9일 새벽부터 10일까지 내린 비가 산사태를 일으켜 샌타바바라 인근 몬테시토 일대를 죽음의 계곡으로 만들었다. 토마스 화재로 초목이 불타버린 산야에 폭우가 쏟아지자 바윗덩어리와 통나무, 흙더미가 거칠 것 없이 쓸려 내려가며 좌충우돌 주택들을 휩쓸었다.
지난달 산불 피해를 면하고 가슴을 쓸었던 주민들은 산사태라는 복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바윗덩어리, 흙더미에 주민들은 피할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세 살 아이부터 89세의 노인까지 17명의 사망이 확인되었고, 아직껏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형체도 없이 파손된 주택이 100채, 부분 파손된 주택이 300채 그리고 상가건물 8동이 무너진 몬테시토 일대는 전기와 가스 공급이 끊기고 진흙더미만 쌓여 석기시대나 다름없다.
새해에 대한 기대로 들뜬 시점에 느닷없이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그들의 절망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삶은 상실과 고통, 예측불허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2018년이 쾅쾅 못을 박아두고 시작하려는 태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예측불허의 어떤 사태가 닥치기 전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귀하게 여기는 겸허한 마음 혹은 지혜이다.
“(삶은) 부서지기 쉽고, 귀중하고, 예측할 수 없어요. 그러니 하루하루는 선물이지요.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아닙니다.”
27살의 호주 여성, 홀리 부처가 한 말이다. 20대의 새파란 나이에 인생 충고를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죽음이다. 희귀암에 걸려 1년여를 투병한 그는 지난 4일 세상을 떠났다. 몸은 점점 상해가는 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많은 날들 동안 그는 삶을 생각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암을 이겨내고 살아난다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깊이 숙고했다고 한다.
결국 죽음이 임박하자 그는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의 방식을 다른 모든 살아있는 이들과 나누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탁대로 가족들은 그가 죽은 후 ‘삶에 대한 약간의 충고’라는 제목의 편지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지난 5일 이후 전 세계 온라인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글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26살에 깨닫고 받아들이기는 좀 이상하다”로 시작하는 편지는 삶의 찬가이다. 삶은 정말 소중한 것이니 제발 쓰잘 데 없는 걱정, 의미 없는 스트레스로 낭비하지 말라고 그는 충고한다. 재깍 재깍 어김없이 찾아오는 날이 언젠가는 더 이상 오지 않게 되고, 그래서 지구상에서 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삶을 최대한 즐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저편 죽음의 언덕에 미리 가서 바라본 삶은 하나 같이 아름답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흰머리와 주름은 그가 그토록 경험하고 싶었던 노년을 살아서 누리는 축복, 밤새 아이가 보채서 잠을 설쳤다면 그건 그가 그렇게도 이루고 싶었던 아름다운 가정을 가져서 누리는 축복이다. 일이 고되다는 불평은 일할만큼 몸이 건강하다는 말, 발을 삐어서 아프다는 건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고통 없이 새 날을 맞는 것, 그냥 숨을 쉴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단 하나 소망은 가족들과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를 단 한 번 더 보내는 것이라고 그는 썼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사실은 기적 같은 ‘선물’이라고 그는 충고한다.
큰 아픔은 큰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큰 깨달음은 위대한 단순함으로 귀결된다. 생명체로서 가장 단순한 본질은 살아있음.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것이다.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나의 친구도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루하루 몸의 상태를 예민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지금, 그는 걸어 다닐 수 있는 것만도 행복이라고 말한다. 전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작은 꽃들, 새소리, 따스한 햇살이 모두 행복을 준다고 한다. 그저 살아있음이 행복, 희망이다.
2018년도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떤 복병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삶은 즐겨야 할 선물, 축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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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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