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쯤 되었을까.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소년이 입을 앙다물고 서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8년 새해인사로 전한 사진이다.
1945년 8월9일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죽음의 도시로 변한 나가사키의 캄캄하고 암울한 도시 전경이 소년의 뒤로 무겁게 펼쳐져있다. 교황이 직접 사진을 골라 인쇄한 신년카드에는 ‘숨진 동생을 업고 화장터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소년’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물어 피가 배어나오는 소년의 비장한 모습을 당시 미 해병대 소속 사진사가 촬영한 것이었다.
지난해 내내 세계를 긴장시켰던 김정은과 트럼프의 핵위협/핵자랑에 대한 규탄, 전쟁이 터지면 가장 여린 존재들이 가장 혹독한 고통으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교황의 카드 뒷면에는 서명과 함께 ‘전쟁의 열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라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경고한지 50여년이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인류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인류 종말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핵전쟁의 위험은 새해 들어 잠시 주춤해졌다. 2월의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의사를 밝히면서 지금 한반도에는 ‘꽃샘’바람이 불고 있다. 혹한의 냉기는 가셨지만 봄바람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우호적 제스처들이 오가고 있다. 남과 북은 오는 9일 판문점 고위급 회담에 합의했고, 한미는 올림픽 기간 연합군사 훈련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당장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정세이지만 불과 며칠 전 2017년의 마지막 날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대반전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서, 어느 예기치 못한 순간 내부압력을 감당 못한 압력밥솥이 터져버리듯 핵 버튼을 눌러버리는 사태는 당분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북측이 필요에 의해서 전략적으로 내놓은 관계개선 제안이니 하루아침에 방향을 틀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은 인류가 이 생에서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도륙 당하고 그 몇 배의 사람들은 원인도 모른 채 참혹한 고통에 내던져진다. ‘전쟁의 열매’이다.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전쟁의 씨앗’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인간의 보편적 본성이라는 설도 있고, 전쟁을 정치의 한 수단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전쟁을 추구하는 전쟁선동가들의 정복욕 지배욕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폴레옹, 히틀러 등이 대표적이다.
서양문명의 시원으로 꼽히는 트로이 전쟁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 서있다. 역사적 실재였다는 증거들이 발굴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리스 신화로서의 트로이 전쟁이다.
전쟁의 발단은 제우스가 주재한 혼인잔치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초청받지 못한 것이었다. 화가 난 에리스는 잔치자리에 불쑥 나타나 황금사과 한 알을 던지고 사라졌다. 문제는 황금사과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서로 ‘내 것’이라고 주장하자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넘겨버렸다. 누구를 선택하든 다른 두 여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 여신은 파리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공세를 펼쳤다. 헤라는 지상 최강의 왕국을, 아테나는 끝없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약속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 헬레네를 얻어 트로이로 데려가는데,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다. 헬레네는 스파르타 왕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10년간 계속되며 트로이와 그리스의 영웅들과 백성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고, 마침내 트로이는 멸망한다. 이 엄청난 비극 혹은 전쟁의 씨앗이 황금사과 한 알, 사과를 둘러싼 여신들의 시기와 경쟁심 혹은 욕심이었다는 사실은 어이가 없다.
아마도 모든 전쟁은 가장 단순하게 압축하면, 일정부분 통치자들의 패권을 둘러싼 시기와 경쟁심, 욕심의 산물일 수 있다. 핵 버튼 크기를 둘러싼 트럼프와 김정일의 말다툼은 그 가장 적나라한 케이스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기와 탐욕, 미움이 전쟁의 씨앗이라고 말한다. 이런 마음들이 세상에 폭력과 살육, 전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해 세상에서 끝난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을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전쟁이 없어야 하겠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 가족 안에서, 우리 직장 안에서,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북한은 2016년 기준 국내총생산의 23.3%를 국방비에 쓴다.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든다면, 그래서 그 돈으로 국민들을 먹인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만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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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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