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는 끝났지만 태평양의 대양과 작은 섬들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결사적인 전투들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최후의 한사람까지…..” 를 외쳐데며 최후발악을 하고 있던 일본이 버티고 있는한 전쟁은 완전히 끝난것이 아니었다.
Guadalcanal 이 1943년 4월에 탈환이된 후에도 다른 섬들을 마저 탈환하고 일본 본토를 공격할 준비를 위해서 다시2년이 또 더 필요하였었다. 2년전에 일본군에 밀려서 “I shall return!” 이란 명언을 남겨놓고 비율빈을 철수했던 Douglas MacArthur 장군 휘하의 장병들은 New Guinea 와 비율빈의Mindanao 섬사이에 있는 서태평양 제도들을 휩쓸어 탈환해 가고 있었다. 동시에 해군과 해병대는 Gilbert, Marshall, Mariana 등의 섬들을 상륙작전으로 탈환해 가면서 중태평양 지역을 통제해야 했었었다. 중태평양의 섬들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한 일본의 비행기들이 MacArthur 부대를 공격해 버릴수 있었음으로 서부와 중부 태평양의 전투는 병행해서 승전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군의 모든 상륙을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격렬한 전투가 있은 다음에야 한치라도 내주었었다. 1943년말에서 1944년초 사이에 Gilbert 제도, Marshall 군도, Mariana 의 Saipan 을 탈환하면서 미군은 많은 사상자들을 내었었다. 1945년 2, 3월중에 Iwo Jima 라는 작은 섬을 탈환하기 위하여 미국 해병대는 5천명의 전사자를 내었었다.
Iwo Jima를 탈환하고 미해병대원 여섯명이 미국성조기를 산의 정상에 함께 꼽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계제되어 미국민들의 사기를 높이 진작 시켰었는데 이 사진을 실물대의 동상으로 만들어놓아 지금까지 Washington의 명물로 남아 있다. Iwo Jima를 점령하고 또 1945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1만1천명의 전사자들을 내면서 Okinawa 까지 점령하자 드디어 미국은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수 있는 근접거리 까지 진격한 것이었다.
이제 최후의 승리는 눈앞에서 아롱거리고 있었다. 서남부 태평양에서 MacArthur 장군의 부대들은 해상전투들을 승전해 가면서 작은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1944년 10월에 비율빈의 Luzon 근처의 섬을 점령하고 격렬한 해상전투를 승전한후 1945년 1월에 본토인 Luzon 상육에 성공하였다. Luzon 을 떠나 Manila 를 남쪽과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 갔는데 일본군들이 집집마다 진지처럼 지키고 앉아 저항하고 있었다. 드디어 1945년3월 9일에 극열한 전투끝에 마지막 일본군이 항복하였다.
미국이 오래전에 입법했던 법에 따라 1946년 7월 4일에 비율빈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 다음해 3월에 비율빈은 미국에게 군사기지와 해군기지들을 99년동안 임대해 주기로 하는 협정이 미국과 맺었다.
FDR 대통령과 원자탄
제2차 세계대전이 격렬하게 진행중에 있을때에 FDR 은 원자탄 개발을 극비리에 시작했다. 최고의 국가비밀로써 부통령인 Truman 까지도 원자탄이 발명되어 가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정도의 국가비밀이었다. 특히 ironic한 사실은 원자탄이 독일과 동구권에서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온 유태계와 동구권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그 과학자들이 Hitler 밑에서 원자탄을 발명했다면 세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WW II 를 승전으로 이끈 원동력이라고 말할수도 있을 FDR 은 독일과 이태리의 항복을 받아보지 못하고, 원자탄이 최종적인 완성이 되기전에, 악착스러웠던 일본의 무조건 항복도 보지못한채 사망하였다. 악독스러운 범인을 자신의 생명까지 돌보지 않은채 검거하고 기소해서 사형언도를 받게 만든 검사가 꼭 사형집행까지 손수 해야만 훌륭한 검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한발작 먼저 불러 가심으로써 FDR에게 마지막의 자비를 베푼것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같은 문외한은 백번째 설명을 들으면서도 멍한 눈초리로 “아, 그런가요?” 라고 대답하면서 알아들은척 할수밖에 없는 “원자탄” 이란것이 원리는 아마 극히 간단한 것인 모양이다. 희랍어가 원어라는 Atom 이란것은 더는 쪼갤수가 없는 가장 작은 물질인 “원자”인데 그놈을 쪼갤수만 있다면 핵분열이라는 것이 되면서 엄청난 폭발력이 발생 한다는 것이다.
더 쪼갤수가 없음으로 원자라고 불러놓고는 이번에는 그놈을 쪼개면 한도시를 한순간에 없애 버린다며 열심히 설명해주는 사람의 정성를 생각해서 “아, 그렇지요!” 라고 알아들은것 처럼 동조 할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원자 하나를 쪼개는것도 불가사의한 일인데 한 원자가 분열하면서 옆에 있는 딴 원자까지 연쇄반응으로 분열하게 만들기 시작하면 한 원자에서 시작된 폭발이 멈추지 못하고 연쇄분열을 혀여서 전세계가 폭발될 가능성도 동시에 연구했어야 했었다니 과학자들이란 시잘때없는 공상들을 너무 많이들 하다가 조금 이상해진 사람들이 아닌지 모르겠다.
1942년 5월에 FDR 대통령은 원자탄을 만들어볼 목적으로 최극비의 Manhattan Project를 시작하였다. 누구의 발상이었던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남은 일은 연구하고 실험을 할 과학자들만 찾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보통정도의 과학자들이 아니라 당시 물리학계의 세계 최고 과학자들을 한군데에 모아야 하는 것이었다. 과연 어느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야 하는 것이었을까? 역설스럽게도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들이 훌륭한 과학자들을 “보내주었다.”
독일에서 유태인이라고 독일시민권도 뺏기고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박해를 받아오던 Albert Einstein 이 건너왔다. 이태리에서는 Mussolini 를 피해서 Enrico Ferrini 가 도망쳐 나왔는데 그는 원자탄의 가능성을 최초로 건의한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추가로 필요했던 수학자, engineer, 과학자들은 당시에 모두 폭정치하에 있었던 Hungary, Austria, Denmark, Czechoslovakia등지에서 왔었고 여기에 미국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추가해서 세계 최고의 과학자단이 구성된 것이다.
University of Chicago 에 Ferrini 교수의 지도아래 비밀연구소를 차린 원자탄 연구팀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연구를 시작한지 7개월만인 1942년 12월 2일 오후 3시 20분에 Uranium 원자핵분열에 성공하였다. 최초의 핵분열을 하였지만 지구도 한꺼번에 폭발해 버리는 재앙도 피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원자탄이 완성되어 최초의 원자탄 폭발시험이 있기 까지에는 Manhattan Project 가 시작된 이후로 3년이 걸렸었고 20억불의 비용이 들었었다고한다.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30분에 New Mexico주의 Alamogordo 외진 사막에서 역사상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되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기게 만드는 섬광과 함께 버섯형의 기둥구름을 형성하면서 원자탄이 폭발된 것이다. 전세계의 국제관계가 변하고 전 인류역사의 방향이 변경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WW II 의 주축국들중 독일과 이태리는 멸망하고 일본만이 가쁜 마지막의 숨을 쉬어가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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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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