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면서 불쾌하고 불안한 경험을 몇 번 했다. 사실은 한국에 갈 때마다 겪는다. 줄을 서 있는데 바로 뒤에 어떤 사람이 바짝 붙는다. 줄이 몇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내게 와서 부딪히곤 한다.
내 차례가 되어 도움을 받으려는 순간 내 어깨너머로 “잠깐 뭣 좀 물읍시다” 끼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내뱉는 숨결을 목덜미에서 느끼면 불안하고 불쾌하다. 내가 한 발짝 떨어지면 한 발짝 다시 붙는다. “좀 떨어져 주세요.” 정색하고 요구도 해본다. 그러면 반 발짝 물러난다. 그리고 곧 다시 붙는다.
옆 사람이 너무 가까이 서있으면 불쾌하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거리, 영어로 “personal distance” 라고 표현하는 거리는 한국어로 쉽게 번역하기가 힘들다.
“개인적인 거리”(personal distance)는 전적으로 문화적인 개념일까? 흔히 영국이나 독일 등 서유럽 사람들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사람들의 개인적인 거리가 짧다고 한다. 이들은 “다혈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서유럽 사람들은 남유럽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서는 행위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친밀한 거리, 개인적인 거리, 사회적인 거리, 공적인 거리의 네 가지로 나뉜다. 친밀한 거리 안으로 들어와도 되는 사람들은 코앞까지 와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거리 안으로 들어와도 되는 사람들은 친구들, 사회적인 거리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들은 지인이다.
공적인 거리에는 생면부지의 불특정한 사람들이 드나든다.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관계에 들어맞지 않게 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이다.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개인적인 거리 혹은 친밀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불쾌하고 불안하다. 관계가 변하면서, 들어와도 되는 거리 역시 변하게 된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친밀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불안하다. 계속 친밀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둘의 친밀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거리에는 생물학적인 설명이 있다. 두뇌 중 소뇌에 위치한 편도체가 개인적인 거리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편도체는 두려움과 경계심을 관장하는데 개인적인 거리 안으로 사람이 들어올 경우 편도체에 자극이 전달되고 두려움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사고로 편도체에 손상을 입은 환자는 어떤 누가 어떤 거리 안으로 들어와도, 심지어 바로 코앞까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도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일본원숭이 또한 친밀한 거리, 사적인 거리, 사회적인 거리로 나뉘고 관계의 성격에 따라 들어와도 되는 거리가 달라진다고 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관계가 달라지면 들어와도 되는 거리 역시 달라진다.
인간의 두뇌는 절대적인 크기 면에서도 엄청나게 크고, 몸집에 비례한 상대적인 크기 면에서도 엄청나게 크다. 인류 계통이 시작한 500만 년 전 400cc 남짓하던 두뇌는 200만 년 전 두 배로 커지고 현재는 평균 1500cc 에 이른다. 이렇게 큰 두뇌가 어디에 쓰이는지 학자들의 논의가 분분하다. 인간의 두뇌는 천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신경세포는 몇 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다. 불과 1cc의 작은 용량 안에도 6억 개의 신경세포 연결이 가능하다고 하니 1500cc를 쉽게 넘는 인간 두뇌 전체가 이루는 신경세포 연결의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무시하다.
이렇게 큰 두뇌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한다는 것은 분명하되, 어떤 종류의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할까? 천문학적인 숫자를 연상하게 하는 정도의 뇌세포와 신경 연결을 통해 수집하고 처리하는 정보는 바로 지극히 사회적인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
서로의 관계를 가늠하여 그에 알맞은 거리로 맞추고, 변화하는 관계 역시 가늠하여 또한 알맞은 거리로 재조정하는 일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요구한다. 특히 무수한 관계가 빠른 속도로 역동적으로 변하는 현대 사회야말로 수퍼 컴퓨터와 같은 두뇌가 빛을 발하는 환경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파악해서 몸과 몸의 거리에 서로 맞추지 못하고 있다면 오랜 기간 진화를 통해 커진 머리를 제대로 쓰지 않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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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 UC 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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