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점심 산책에 나선다. 과거 입주해 있던 비즈니스 팍을 페이스북 본사가 가공할 현금 동원력으로 통째 매입하는 바람에 프리웨이 반대편으로 이사온 지도 10개월째이다.
지난 1월 이사왔을 때는 우기여서 건물 바로 옆의 계곡 물살이 어찌나 깊고 빠르던지, 마치 어릴 적 살았던 우이동에서 장마철의 우이천 계곡물을 보는듯 했다. 힘찬 기세로 흘러내리던 물도 바싹 말라 바닥을 드러낸 계곡을 따라 운치있게 지어진 주택가를 걸어가다 보면 철길이 나오고, 여길 건너 스탠포드 샤핑센터 깊숙이 자리한 노스트롬 백화점까지 갔다 돌아오는 왕복 3마일의 점심산책은 정말 나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준다.
건널목을 지나노라면 최근 실리콘밸리에 새로 생긴 직업인 ‘철길 지킴이’가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두 아들도 나온 명문 공립학교의 하나인 팔로알토의 건 하이스쿨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수 년 사이 10여명이나 철길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슬픈 사건들이 발생하자, 교육구가 시와 협의해 건널목 지킴이들을 고용한 것이다.
건너가는 고유한 일 이외의(?) 목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이들은 잘 감시하고 있다. 이후 실제로 그런 비극이 많이 줄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엔 이웃 시에서 안타까운 사고소식이 들려왔다.
가족들의 깊은 슬픔이 담담하게 담긴 품격 있는 언어의 오비추어리, 부고를 찬찬히 읽어본다. 오른쪽 상단, 예쁜 금발의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딸 없는 나의 눈에 들어온다.
“필립과 줄리 스팔렛타 부부의 너무나 소중했던 14살의 딸 홀리가 지난 26일 홀연히 천국으로 갔습니다. 홀리는 아름다운 동네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세코야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던 친구들과의 우정도 깊었던 신입생이었습니다.
동물학대 방지협회의 자원봉사자로, 그리고 4H 클럽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클럽 내 상담자가 되기 위한 훈련과정을 막 시작했었습니다. 홀리는 어여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위트가 있고 아주 믿음직한 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친구였고, 따뜻한 배려심을 가진 홀리가 살아 숨 쉴 때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당신이 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홀리는 4명의 오빠와 언니, 우리 부부와 조부모와 삼촌들과 여러명의 사촌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기념으로 선물 받은 BMW 미니쿠페를 두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천국환송예배 일정은 ….”
크나큰 슬픔에 싸인 부모는 5명의 자녀를 두었고 막내딸이 고교에 입학하자 미니쿠페를 사줄 정도로 경제력이 있는, 고학력의 성공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딸의 친구들에게 눈물로 부탁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딸은 엄마에게 너무 놀라지 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사시라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이렇게 가버리고 나면 남은 가족들은 절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가 없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큰 충격을 주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부탁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부모는 8개월 전부터 딸이 수학문제 풀이와 메모를 위해 갖고 다니던 공책에 여러장이 백지로 방치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의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교내 상담원과 면담을 한 것도 사후에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요한 일을 학교가 부모에게 바로 알려주면 좋을 것이라는 건의도 잊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그 어린 꽃들이 차마 피기도 전에 스스로 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부모들 교육수준이 제일 높은 곳 중의 한곳인 이곳 실리콘 밸리의 아이들은 부모만큼 우수한 학업성과를 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금만 학업에서 뒤처지면 실패한 인생을 계속 살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기 쉽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미래의 삶은, 비록 고통이 수반될지언정 그 불확실성만으로도 얼마나 살아볼만한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만든 비극의 시나리오에 자신을 가둬놓고 괴로워하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사이먼과 가펑클의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 친구들아, 내가 다리가 되어줄게… 나를 밟고 부디 건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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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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