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와 종루가 우뚝 선 상원사 용마바위 뒤편 능선으로 단풍이 아래로 내닫고 있다. 계곡을 오르는 안개와 어우러져 멋진 가을 풍경을 빚었다.
상원사로 오르는 길 치악산 7부 능선은 이미 단풍이 절정을 지나고 있다. 물기를 머금은 낙엽 빛깔이 밟기 아까울 정도로 곱다. <최흥수 기자>
고갯마루 돌탑 지나면 본격적으로 단풍이 시작된다.
힘 들게 산길을 오르는데 이따금씩 지나는 차량을 만나면 괜히 억울하다. 사찰에 용무가 있어 드나들겠거니 이해하면서도 손해 보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치악산 상원사는 모두에게 평등한 절이다. 남대봉 아래 해발 1,084m에 위치해 찻길이 없기 때문이다. 상원사는 지리산 법계사(1,450m)와 설악산 봉정암(1,244m) 다음으로 높은 곳에 세워진 절이다.
은혜 갚은 꿩 설화 간직한 상원사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절에 올라오는 물건을 담은 통입니다. (오는 길에) 하나씩 올려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주 신림면 치악산 등산로 입구 쉼터에는 상원사 물품 보관함이 마련돼 있다. 성남탐방지원센터에서 2.6km 위 마지막 주차장이다. 이곳부터는 경치도 운치도 누구나 걸은 만큼만 얻을 수 있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에 산행을 시작했다. 초입은 완만한 경사로다. 물소리 맑은 계곡 따라 발걸음도 산뜻하다. 이따금 먼발치의 단풍이 시선을 끌고, 물길 주변엔 노란 낙엽이 바위를 덮었다. 물살에 소용돌이치는 나뭇잎이 이미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린다.
상원사까지 2.6km, 2시간30분이 걸린다는 안내판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역시 쉽지 않다. 1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면 경사는 조금 더 가팔라진다. 수직의 급경사는 아니지만 계곡을 오르는 길은 단 한 번도 평지나 내리막이 없다. 다시 한번 상원사에 거처하는 스님들이 존경스럽다. 승려들은 이 길보다는 원주 시내와 더 가까운 금대 방면 등산로를 주로 이용한단다. 힘든 것보다 거리가 짧은 게 우선인 모양이다.
7부 능선쯤 올랐을까, 오가는 길손이 하나씩 쌓아 올린 돌탑을 지나자 갑자기 주변이 환해진다. 잎새 끝까지 번진 선홍 빛 가을이 촉촉한 물기와 함께 뚝뚝 떨어진다. 곱고 은은한 빛깔이 숲으로 번진다. 햇살이 좋으면 불타는 듯 눈부시겠지만 분위기는 비 오는 날이 한결 낫다. 등산로 양편에 빼곡한 조릿대는 더욱 진한 초록을 뽐내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안개에 원근감이 더해 딴 세상을 걷는 듯하다. 발걸음도 한결 수월해진다.
상원사를 코앞에 두고 고갯마루에 오르자 희뿌연 구름 속에 상원사 종루와 전나무가 꼿꼿이 선 바위절벽이 선경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산꼭대기 작은 절간이지만 상원사는 치악산을 대표하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은혜 갚은 꿩 이야기는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치악산 기슭에서 수행하던 한 승려가 어느 날 산길에서 큰 구렁이가 새끼를 품은 꿩을 죽이려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쳐서 구했다. 그날 밤 잠자던 승려가 가슴이 답답해 눈을 떴더니 구렁이 한 마리가 몸을 칭칭 감고 노려보며 꿩 대신 잡아 먹겠단다. 단 날이 새기 전에 종소리를 들으면 살려 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종이 세 번 울려 승려는 풀려났다. 아침에 상원사에 올라 보니 종루 밑에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원래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렀는데, ‘꿩 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으로 부르게 된 것도 이 설화 때문이다.
처소로 쓰는 심검당(尋劒堂) 측면에 이 이야기를 형상화한 목조각이 걸려 있는데 내용은 조금 다르다. 주인공은 스님이 아니라 갓을 쓴 선비이고, 잠을 잔 곳은 여인으로 변장한 구렁이가 유혹한 집이다. 종을 친 새가 까치였다는 설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러 버전으로 각색된다. 지금 매달린 종은 당연히 근래에 만들었다. 꿩 정도로는 어림없고 익룡(翼龍)쯤은 부딪혀야 소리가 날 법한 큰 종이다.
범종루 바위절벽은 용마(龍馬)의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옛날 제천 감악산 백련사에 부인을 둔 스님이 상원사에는 첩을 두고 있었단다. 낮에는 상원사에서 일을 보다가 저녁이면 하늘을 나는 용마를 타고 백련사로 날아가 밤을 지새고 아침이면 다시 날아왔다. 이를 눈치 챈 부인이 어느 날 말먹이를 반으로 줄였다. 힘이 달린 말은 마당에 착지하지 못하고 바위에 부딪혀 떨어졌다. 원주읍지에는 바위에 말의 핏자국과 기를 쓰고 매달린 스님의 손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스님이 어찌 부인이 있느냐고 따지고 들면 할말이 없다. 2기의 석탑과 종루, 오래된 전나무와 계수나무가 올라 앉은 바위의 형상이 전설 하나쯤 없으면 허전할 만큼 범상치 않다는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단풍과 운해에 오롯이 자신을 찾는 여정
상원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넓고 장쾌하다. 뒤편 산기슭을 제외하고 동남서 방향으로 툭 트였다. 용마바위 끄트머리에 서면 아찔한 발끝 아래 멀리 영월과 제천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능선을 그린다. 그 산줄기 따라 지금 한창 단풍이 내닫고 있다.
올라오면서 등산로에서 본 단풍의 감동과는 스케일이 다른 큰 그림이 펼쳐진다. 붉은 기운을 다해 이미 황갈색으로 변한 산정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선홍색으로 정점을 찍은 단풍 물결이 점점 녹색의 숲을 잠식해 간다. 마침 골짜기 사이로 서서히 안개가 기어올라 끝내는 온 산을 운해로 뒤덮었다. 황홀경이다.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상원사 대웅전에도 4개 벽면을 따라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인간의 본성에 이르는 과정을 소를 찾는 여정에 비유한 그림인데, 마지막에는 애써 찾은 소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보니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단풍에 반해, 운해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가 마침내 단풍은 사라지고 안개 속에 등산객만 남았다. 이제 그만 내려가라는 신호다. 조금은 어둑해진 하산 길을 노랗게 떨어진 가을의 흔적들이 안내한다. 우중 단풍놀이가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텅 비어 있던 상원사 물품 보관함이 검은 비닐 봉지로 가득 찼고, 무거운 짐이 실린 지게 2개가 짐꾼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원사 등산로는 원주 판부면 금대리와 신림면 성남리 두 곳이다. 대중교통은 성남리보다 금대리 쪽이 편하다. 원주역에서 금대리까지는 21~25번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성남리행 버스는 하루 5회 운행한다. 성남으로 올랐다가 금대로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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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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