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 폭포 소리가 그립던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가을색이 선연하다. ‘천둥소리를 내는 물’은 이 땅의 선조인 인디언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붙인 이름이다. ‘천둥소리’라는 이름을 알고 다시 폭포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언어감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무렵, 류시화 시인이 엮은 인디언 연설문 모음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만났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삶이 원주민 선조의 영혼을 닮는다면 현재보다 조금은 더 맑고 조금은 더 편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책 속의 주인공 영혼을 닮고 싶다고 바란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가 자기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생존한다. 캐나다에서도 다양한 부족이 각기 다른 언어로 자신의 신을 추앙하고 고유한 문화를 계승하며 살았다고 한다. 유럽인이 정착하기 전까지는 맞서는 대결구도가 아닌, 공존하고 공생하는 삶이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해안에서 물고기를 잡고 버팔로 떼를 쫓아 평원으로 이동하며 자연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던 그들에게 유럽인의 물결과 함께 큰 변화가 찾아온다.
백인에게 땅을 넘기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마찰과 폭력으로 원주민은 살던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토착화한 문화를 지우고 서구문화를 주입시키며 원주민이 섬기던 신을 서양의 유일신으로 대치하는 과정에서도 피를 흘려야 했다. 문서화된 조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소유의 개념도 축적의 의미도 알지 못하던 원주민의 거의 모든 땅이 백인 소유가 된 후 원주민은 보호지역으로 강제 이송된다.
조약에 서명을 하고 약속을 수없이 하면서도 번번이 지키지 않는 백인에 대한 불신은 끝없는 저항과 항거를 불렀다. 그러나 싸움에서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게 마련. 피를 부르는 무력 앞에 흙과 하늘과 공기를 사랑하는 그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인디언이 아닌 원주민으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그들은 이제 북미 대륙에서 수적으로 질적으로 하향곡선을 긋고 있다. 원주민은 그 지역에서 본래 살던 사람을 의미한다. 전 주인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어떻게 그들이 주인의 자리를 내주고 보호구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궁핍한 삶의 터전을 내리게 되었는지.
북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는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춰보는 일일 수 있다.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몇 페이지쯤은 지우고 싶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과거보다 현재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선진국 명성에 얼룩으로 남은 시대를 굳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사명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책을 읽으며 원주민에 대한 서구사회의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을 무능하게 만드는 일은 고통도 슬픔도 아니다. 부족함이 없는 환경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 수 있다. 정신적인 해이와 권태롭고 안일한 삶에 알콜마저 거의 무상으로 배급 받는다면 몸도 정신도 망가지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알콜 때문에 영혼의 힘마저 잃을 수 있음을 알았다 하더라도,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황폐한 보호구역에서 그것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
원주민 선조의 생활 방식을 들여다보면, 백인의 소위 문명화된 생활 방식과의 사이에 메우기 어려운 간극이 보인다. 야만인으로 간주하는 원주민의 삶에서 때로는 뜻밖의 지혜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좋아한다. 1월을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 2월은 ‘더디게 가는 달’, 3월은 ‘잎이 터지는 달’…, 12월은 ‘침묵하는 달’로 부르는 그들의 말 맛을 나는 좋아한다. 개개인의 이름도 낭만이 서려있고 자연친화적이다. ‘서 있는 곰’, ‘붉은 구름’, ‘예쁜 방패’, ‘작은 버드나무’ 같은 이름에는 마음에 남는 울림이 있지 않는가. ‘홀로 서 있는 늑대’라는 이름에서는 늠름한 기상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바람의 아들’은 아마 태어난 날 바람이 몹시 불었으리라.
원주민의 자연 사랑은 눈물겨울 만큼 원초적인 호소력을 지녔다. 우리가 대지의 일부이고 대지가 우리의 일부임을 호소했고, 숫자와 서류에 집착하느라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나무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문명인에게 공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네모가 아닌 원을 중시한 그들. 위아래가 없고 앞뒤도 없으며 시작과 끝이 없는 원으로 둥근 고리를 만들어 가면 모두가 평등한 하나가 되어 평화롭다는 논리였다.
그들이 원한 것은 소박한 자유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 자유로운 사람이게 해 달라. 여행할 수 있는 자유, 휴식할 자유, 일할 자유, 스승을 선택할 자유, 내 아버지들의 종교를 따를 자유.”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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