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명언”을 하나 건졌다. 지상에서의 한 달을 위해 땅 속에서 17년을 굼벵이로 견뎌야 한다는 매미의 일생을 두고 “너무 억울하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에 “매미가 굼벵이로 견딘 세월이 억울하기만 할까? 매미는 굼벵이의 목표가 아니라, 살아야 하는 세월을 다 살고 마주한 노년이 아닐까?”라는 질문은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드라마를 보며 나는 딸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는 딸의 꿈을, 그야말로 ‘매미’도 못되어 보고 ‘굼벵이’로만 끝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에 선뜻 지지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예술의 세계에서 어정쩡한 재능은 저주”이며 “공부가 제일 쉽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그 후 딸과 자주 부딪쳤다. 결국 딸은 무용을 전공하지 않고 다른 길로 갔다(딸은 지금도 발레 공연을 보지 않는다).
딸이 이제는 성인으로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했기 때문일까, 요즘은 문득문득 그 때 아이의 꿈을 존중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나는 그 때 ‘발레리나’ 하면 영국의 로열 발레단이나 뉴욕시티 발레단의 프리마돈나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 길은 너무나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되도록 뒷받침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아이가 아닌 내가 자신이 없어 포기를 종용한 것이고, 아이에게는 시도해 볼 기회조차 주지 않은 셈이다.
물론 아이가 원하는 길을 갔더라도 앞날이 어찌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제 스스로 힘들어 도중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았을지도 모르고, 유명 발레단이 아닌 동네 교습소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금까지도 먼 길을 헤매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 시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굼벵이의 시간‘처럼 딱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스스로는 그리 불행하다 여기지 않으며 살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는 추석 연휴가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청년 백수 100만명 시대라는데, 자식의 모습으로 부모가 평가되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그리고 그 부모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비단 한국뿐 아니고 주위에서도 자식 일에 목숨을 거는 많은 젊은 부모들을 본다. 그 모습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들의 귀에는 지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먼저 시행착오를 겪은 엄마로서 두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는 아이의 인생과 거리를 두는 것이고, 둘째는 아이에게 실패할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상호연관된 것이고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아이가 힘든 길로 가려는 것을 말리지 않을 부모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에게 해롭고 이웃과 사회에 해가 되는 길이 아니라면, 아이를 말리기보다 아이가 그 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새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내공을 길러주어야 하지 않을까(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국에 사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나이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은가).
아이의 내공을 키우는 지름길은 아마도 아이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일 것이다. 이는 아이를 믿고 지켜봐 주는 부모의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아마도 나처럼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믿을 만해야 믿지” 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말도 맞지만, 아이는 부모가 믿어주는 대로 변하기도 한다. 믿고 기다리기에는 속이 터지고 답답한 부모라면 굼벵이의 시간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땅속에서 인내로 버텨야 하는 굼벵이로서의 시간도 그 자체로 의미있고 소중한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조급증을 다스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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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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