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창세기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몹시도 뜨거운 날 장막 입구 그늘에서 쉬고 있던 아브라함은 멀리서 낯선 사람 세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사막의 열기로 지쳤을 그들을 그는 달려가서 맞는다.
아브라함은 공손하게 땅에 엎드려 절한 후 생면부지의 길손들을 초청한다. 물을 가져다 발을 씻게 하고,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게 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며,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 정성껏 대접한다. 나그네들을 하나님의 천사로 믿고, 천사 섬기듯 환대한 결과 아브라함은 상상도 못한 축복을 받는다. 평생 불임이던 아내 사라에게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는다. 유대인 혈통은 손님대접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 날의 환대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의 아버지로서 아랍인 조상에 그쳤을 지도 모른다.
낯선 손님을 잘 대접한 덕분에 엄청난 축복을 받은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도 나온다. 이번에는 백발의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키스가 주인공이다. 가난한 노부부의 오두막에 어느 날 제우스와 아들 헤르메스가 들어선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여행 중이던 신들은 날이 저물자 하룻밤 묵기 위해 여러 집 문을 두드렸지만 사람들은 차갑게 거절했다.
착한 노부부는 달랐다. 집 떠나 고생했을 나그네들을 반갑게 맞아들인다. 걸상에 명절에나 까는 방석을 깔아 손님들을 쉬게 하고, 화로에 불을 피우고 따뜻한 물을 대야에 부어 손발을 씻게 한다. 그리고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총 동원해 요리를 하고 아껴둔 포도주를 꺼내 식사를 대접한다. 그런데 포도주가 이상했다. 따르고 따라도 술병에 계속 술이 차올랐다.
“이 분들이 신들이로구나” 깨달은 노부부는 허름한 음식을 대접한 무례를 용서해달라고 빈다. 제우스는 “나그네 대접할 줄 모르는 이웃들은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며 노부부를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간다. 온 마을은 물에 잠기고 노부부의 오두막은 웅장한 대리석 신전으로 우뚝 솟아난다. 아브라함의 환대와 노아의 방주가 합쳐진 듯한 이야기이다.
구약성경이나 그리스 신화가 나그네 대접을 이렇게 강조한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천년 구전으로 이어오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가르친 배경은 인간의 이주 역사와 상관이 있어 보인다.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지배적이다.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20만년 전 쯤 아프리카에서 발원했다고 본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고향에 안주하지 않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주했다. 유럽과 아시아로 진출하며 그곳에 먼저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 등 고생인류를 대체함으로써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를 열었다.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는 일이 쉬웠을 리가 없다. 인류의 이주민 조상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토박이들과 경쟁하면서 생존의 비결을 체득했을 것이다. 우리가 아닌 남들, 낯선 자들을 적으로 삼는 대신 공동체 안에 받아들이는 것, 포용함으로써 우리 편으로 만드는 지혜이다. 그렇게 공동체를 확대하면서 호모 사피엔스는 세력을 늘렸을 것이다.
낯선 자 즉 나그네 환대는 인류가 수만 년 이주의 경험을 통해 제2의 본능처럼 얻은 삶의 원칙이 아닐까 생각된다. 낯선 자를 먹이고 입히는 게 당장은 손해 같지만 결국은 이득/축복이 이라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신화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호혜적 이타주의를 말한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가 제시한 호혜적 이타주의는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이타적으로 돕는 것은 그도 언젠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낯선 곳에 첫 발 디딘 이주자를 그 사회가 도우면 이주자는 이후 정착에 성공하면서 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 바로 이민이다. 이민은 호혜적 이타주의의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 이민 3세인 트럼프 대통령이 반 이민정책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법이민자는 몰아내고, 합법이민은 절반으로 줄이며, 그것도 능력 있는 이민자만 받겠다는 방침이다. 이민을 줄여 미국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인데,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민이 미국 경제발전의 핵심 요소라는 사실은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바이다.
이민을 받는 것이 당장은 손해 같지만 그들이 열심히 일해 경제성장에 기여하고 그 후손들은 각 분야로 뻗어나가 사회에 기여하면서 최강의 나라를 건설한 것이 미국의 역사이다. 피부색, 민족, 출신국가, 종교, 성별 등 다름의 장벽들을 헐어내고 이타적 수용으로 다양성의 가치를 최대한 활용한 나라가 미국이다.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엠마 라자루스의 시에서), 그 낯선 자들을 가능한 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인류의 조상이 수만년 전부터 물려준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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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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