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 그리 바빴는지 한동안 가지 못했던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지난 일요일 하루를 보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군의 함대 사령부였던 프레시디오의 메인포스트에 주차를 한 후 조깅으로 금문교를 건넜다. 갤러리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들을 찾아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아름다운 소살리토까지 가서 페리로 돌아오기로 했다.
며칠 전 금문교에는 30톤이 넘는 진객 혹등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다리 밑까지 찾아와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는데 그새 어디론가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화물선들이 유유히 베이를 빠져나가 태평양으로 향하고 있고, 흰 돛을 올린 요트들과 가지각색의 카약들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새들 사이를 미끄러져 간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아스라한 고층건물을 배경으로 바다 건너 마린카운티에서 베이를 바라보며 나는 40 여년 전 추억에 젖었다.
넷째 삼촌은 외항선 기관사였다. 전 세계를 돌다가 ‘형님 전상서’ 로 시작하는 사진엽서를 아버지께 보내신 곳이 샌프란시스코였다. 금문교 야경을 담은 사진엽서였다.
망망대해에서 1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삼촌이 드디어 인천항에 입항하셨다는 설레는 소식이 어느날 날아들었다. 신혼 초에 별거 아닌 별거를 하느라 가슴 아린 숙모님도 며칠 전 부산에서 올라와 재회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셨다.
삼촌이 진기한 물건을 가득 담은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사업에 실패한 큰 형님댁인 돈암동 우리집에 오신 40여년 전의 그날은 무척이나 설레는 날이었다. 삼촌이 유독 조카들을 사랑해서 그리움이 크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와 여중 2학년이었던 누이에게는 철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삼촌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잘 지냈는지 물어보시고는 트렁크의 지퍼를 큰 디긋자로 드르륵 여실 때 누이와 나의 눈길은 어느새 트렁크 저 깊은 곳에 가있었다. 이번엔 어떤 선물을 가져오셨을지 우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한껏 기대에 들떴다. 여행가방에서는 금방이라도 온갖 보물들이 넘쳐 나올 것 같았다.
드디어 열렸다. 삼촌은 장형인 아버지에게 고운 쇼핑백에 담긴 당시로선 귀한 조니워커 양주 한병, 형수인 어머니에게는 똑딱하고 열면 예쁜 손거울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퍼지던 랑콤 파운데이션과 붉은 립스틱을 선사하셨다.
우리에게는 당시 큰 인기였던 미제 파커 만년필, 꽁지가 달린 작은 삼각형 은박지의 허시스 초컬릿 그리고 그림책에서나 보았을 뿐인 탐스런 오렌지를 한 개씩 건네주셨다. 우린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며칠 동안 행복했었다.
다섯 분의 삼촌들이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우리의 어린 시절 좋은 기억의 한 자락씩을 채워주셨지만, 이 삼촌은 특별했다. 결혼 전까지 마포에서 경찰공무원으로 일하며 바로 위 누이와 내가 감수성 예민하던 청소년기에 속 깊은 사랑으로 항상 우릴 응원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하숙비랑 생활비 충당에도 빠듯했을 당시 박봉에도 삼촌은 월급날이면 꼭 우리 집에 오셔서 형수에게 생활비에 보태라며 봉투를 건넨 착한 시동생이었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형님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을 하셨고, 우리들에게도 항상 정서적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셨다.
삼촌은 진주여고 출신의 고운 숙모님을 중매로 만나 부산에서 늦장가가신 후,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려 외항선원이 되었다. 몇 년간 고생하더라도 일찍 안정을 찾겠다는 결심이었다. 한번 출항에 1년이 걸리는 긴 항해를 몇 년 되풀이한 끝에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셨지만 삼촌은, 어느 해인가 결핵이 깊어진 숙모님을 두고 더 이상 떠날 수 없어 외항선에서 하선하신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으셨다.
여동생이 없어 늘 허전하던 내게 예쁜 사촌 여동생을 주셨던 숙모는 몇 달 뒤 결국 돌아가셨다. 요양원에 가서 집중치료를 받으라는 의료진과 주위의 권유를 받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린 자식들을 두고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망설이던 끝에 그만 치료시기를 놓치셨다.
속 깊고 다정하던 삼촌은 그 길로 혼자가 되신 후 40여년 홀로 지내시더니 어느덧 80 초반의 할아버지가 되셨다. 가는 세월 누가 막으리. 다섯 분 삼촌들 중 이제 두 분만 남아 삼촌세대가 저물어 가는 게 슬프고 안타깝다.
40여년 전 당신이 그림엽서를 보내셨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카가 그림엽서를 보내드린다. 노년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조카가 삼촌께 그리운 마음을 담아 보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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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 실리콘밸리 부동산 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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