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미국대공황의 국제적 영향
지난 호에 실렸던 “대공황중의 통계표”는 대공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었던 것인가를 숫자로 잘 보여준다. 미국의 수출양은 1928년에 50억불이 넘던 것이 1932년에는 15억8천만불로 쪼그러 들었다.
새 주택 건설비용은 1928년의 42억불에서 1932년의 4억9천만불로 거의 10분의1로 줄어 들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결혼한 사람들도 새 집을 살 엄두를 못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계속 낮은 농산물 가격으로 시달려 왔던 농업 부문에서도 비료 사용량이 1928년의 3억2천만불에서 1932년의 1억2천만불로 거의 3분지2가 감소되었다.
한편 정부 총지출 비용은 경기의 불황으로 매년 세입은 줄어들고 있었으나 지출은 대폭으로 늘렸어야 했음을 보여주듯이 1928년에는29억3천만불이었던 것이 매년 증가되어 오다가 1932년에는 46억6천만불로 늘어났다.
꾸준히 과잉생산을 해서 계속된 농산물가격 하락으로 시달려 왔던 농산물 매상액은 1928년에는 109억9천만불 하던 것이 매년 줄어들기를 계속하다가 1932년에는 47억5천만으로 절반 이상이 줄어 들었다.
경제활동이 줄어드는 것을 잘 보여주는 지표가 목재 사용량인데 1928년에는 368억 Board feet를 생산했다가 매년 엄청나게 줄어들기 시작하여 1932년에는 135억 board feet 로 거의 3분의2가 줄어 들었다.
노동자들의 평균 주급은 1928년에 24불97전 했던 것이 매년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1932년에는 17불5전으로 까지 내려갔다. 1928년에는 실업자수가 208만명이던 것이 매년 폭증하기 시작하여 1932년에는 1천2백60만명에 이르렀는데 이 숫자는 미국 전체 노동자수의 4분의1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매4인 중에 한명은 실직자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위와 비슷한 통계숫자를 보여주는 나라들이 지구 곳곳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역사로 볼 때에는 끔찍한 통계숫자들이었다.
직장이 있다고 하던 사람들 중에도 part-time 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세를 낼수 없게 된 많은 사람들이 친척이나 친구의 집에 비집고 들어가 염치없이 신세를 지고 살게 되었다. 수천, 수만 명의 실직자들이 “혹시 다음 도시에서는 .. “ 이라는 희망을 품고 떠돌아 다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듯한 집에서 살던 많은 사람들이 종국에는 빈땅에 두꺼운 종이나 나무조각들로 움막을 짓고 몰려서들 살았는데 이런 빈민촌들을 “Hooverville”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가 헌옷이나 헌가구 뿐만 아니라 배달받아 먹고난 중국음식 plastic 통까지 씼어서 보관하는 것을 보고 “제발 좀 버리고 사세요” 라고 “부자집 막내아들” 같은 여유있는 말을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자기네들 부모들의 “자린고비 스러움”을 이해한다고 얘기할 때에 “우리 부모들은 대공황을 직접 경험한 분들인 탓입니다” 라고 말한다.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젊은이들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하여 대공황 시작후
3년 안에 평균 결혼의 4분의1이 줄어 들었다고 한다. 대학교를 가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 들었고 부모의 실직으로 수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굶주렸으며 뉴욕시 아이들 3분의2가 영양실조를 당했고 아이들에게 먹일 찌꺼기 음식을 찾아 골목길 쓰레기통을 뒤지는 부모들도 있었다. 곳곳에서 지방정부나 자선단체가 무료로 주는 soup 와 빵을 얻어먹기 위하여 무직자들이 장사진을 쳤으며 Chicago 에서는 Mafia 두목 Al Capone 도 무료 soup 을 제공했었다고 한다.
미국의 대공황은 전무후무했던 것으로써 지금까지도 원인에 대해서 경제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분분한 것인데 자본주의 경제가 어느 지경에까지 붕괴되어 갈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 경제경기와 적절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 대공황 얼마 전에 발표된 Keynesian 이론이 실제로 유효하다는 것이 확인된 역사적인 사태이었다.
미국의 대공황은 미국내의 공황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미국 수입관세의 인상, 이에 맞선 각국의 관세의 보복인상, 독일의 전비보상 지불중지 등 으로 국제무역이 절반으로 감소되고 유럽의 모든 나라들도 공황을 같이 경험하게 되었다.
유럽의 몇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도 불황에 빠져 있었다. 유럽의 여러 은행들도 미국과 비슷하게 예금자 인출소동이 있었으며 1931년 6월에는 독일과 Austria 에서는 금융붕괴가 날 수도 있었을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이 무렵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금본위 통화제도를 벗어나기 시작 하였다.
미국의 대공황은 국제정치에도 중대한 변화가 오도록 하였다. 미국은 일본, 독일, 이태리, 불란서 을 포함한 60개국들과 해군군비를 감소하기로 협정을 맺었고 9개 강국과는 별도로 군비 축소협정을 맺었는데 거의 공개적으로 이 협약들을 위반 하거나 무시하는 나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League of Nations 나 미국도 이런 위반들을 단속할 여유나 관심이 부족하였다.
1922년에 Benito Mussolini 는 Fascism 으로 이태리에 독재정권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며 국제적 적대 관계와 위협을 서슴치 않았다. 이태리의 도전에 자극을 받은 불란서도 해군력 감소를 중단하였다.
독일에서는 Adolf Hitler 의 Nazism 이 정상적인 투표를 통해서 실권을 잡아가기 시작하였고 Hitler 는 1933년에는 수상으로, 1934년에는 Fuhrer (독재자) 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Vienna 에서 미술학교 입학시험에서 세 번이나 낙방한 후 독일에 옮겨간 Austria 의 “이민자” Hitler 는 타고난 언변으로 제1차 세계대전 패배후에 절망심으로 가득찼던 독일사람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단결”을 이루었고 독일사람 들이 “자발적으로” 국수주의 자들이 되도록 하였다. 그는 전비보상으로 독일을 영구적인 채무국가로 만든 베르사이유 조약을 반대하였으며 독일을 공산주의, 자본주의, 유태인들이 망치고 있다고 독일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고 기독교를 반대 했었다.
Mussolini 와 Hitler 는 미국의 대공황의 여파로 유럽까지 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혼란해 졌을때 독버섯처럼 일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국제정치의 위협자들로 등장하였다. 몇 년 전 Vienna를 갔을 때 관광안내원은 “우리는 Hitler 는 독일인이고 Mozart 는 Austria 인 이라고 주장합니다!” 라고 농담섞인 어조로 역설하였다. 사실은 Hitler 는 Austria 인이고 Mozart 는 당시 Austria 가 독일령이었음으로 독일인이다.
일본은 비교적 외부의 관섭없이 1931년에 만주를 정복하고 1932년에는 만주국 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부의 황제를 만주국의 황제로 “임명”했다. 또 1932년에 일본은 상해를 침범하여 시내를 폭발하고 수천 명의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대공황으로 옆을 넘겨볼 겨를이 없었던 미국은 일본의 만주점령을 사실상 묵인하였다.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며 침략과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는 미.영.불 등의 무관심을 보고 Hitler 와 Mussolini 는 세계 정복의 꿈을 다시 시작하더라도 선뜻 나설 나라들이 없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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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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