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구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들과 짐들을 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비행기 안에 다 들어갈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탑승이 시작되면 차곡차곡 정리가 되면서 모두 기내로 들어간다. 짧은 시간에 그렇게 잘 정돈되는 인간사가 또 있을까?
나는 인간사를 ‘무질서를 질서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한다. 비행기를 타는 일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일이다보니 기내 개인들에게는 스트레스가 증가되어 마찰이 일어나기 쉽다. 스트레스 외에 개인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폐쇄 공포증 외에도 땅콩 알레르기로 기도가 막힌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기내에서 땅콩을 주지 않게 되었다.
꽤 오래 전 시카고에서 학회 참석 후 아메리칸 항공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오는 도중 기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의료인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두어 명이 일어나 나가는 것 같아 나는 계속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방송이 나왔다. “의사 있으면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마지못해 앞으로 나갔다. 어린 여자아이가 늘어져 있고 젊은 부모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노란 산소마스크를 여아의 입에 대고 부모에게 병력을 물어보니 소아 당뇨가 있다고 했다.
당뇨기기로 혈당을 측정해보니 저혈당, 쇼크에 빠진 아이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음료수를 마실 수도 없었다. 혈관으로 포도당을 주사하는 일이 시급해 기내 응급조치 가방을 열어보니 혈압계는 조립도 안 된 상태고 포도당 수액은 있는데 주사바늘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옆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커피 잔과 설탕봉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저거다!” 나는 설탕봉지를 찢어 아이의 턱을 간신히 벌려 설탕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기다리자 아이가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혈당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와 오렌지 주스를 숟갈로 떠먹였다. 혈당이 안정권으로 되면서 나는 식은땀을 닦았다. 기장이 와서 비상착륙을 해야 되느냐고 내게 물었지만 다행히 여아의 상태가 점점 호전 되었다.
기내 승무원들의 요구에 나의 신상과 무슨 조치를 했는지 자세히 기록을 해야 했는데 상당히 귀찮고 피곤했다. 착륙 직전 지상에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놓았고 도착해서 모든 승객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어 환자와 부모와 내가 먼저 내릴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서유지를 위해 불편을 감수했다.
몇 주 후 아이 부모로부터 편지가 왔다. “닥터 김, 정말 고마웠습니다. 딸아이가 건강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아찔한 순간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나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중에도 나는 아메리칸 항공사에 편지를 보냈다. “x월 x일 기내에서 응급상황을 맞아 응급조치 가방을 열어보니 조립되지 않은 혈압계와 바늘 없는 링거액과 약품만 있었습니다. 제발 이런 일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조치를 해주세요.”
몇 년 후 다시 아메리칸 항공을 타고 엘살바도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중년 남자가 혈압이 떨어지면서 호흡곤란과 가슴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 다행히 그 비행기 안에서는 여분의 산소통도 잘 작동되었고, 응급조치 가방 안에는 조립된 혈압계, 주사바늘과 링거 수액 여러 봉지와 약품들이 있어서 환자를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때는 바다 위를 날고 있었기에 비상 착륙할 장소도 없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해진다.
다행히도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어 좋은 의도로 환자를 치료하다가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의료인들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어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기내방송을 통해서 도움을 요청받은 경우에 한하고, 인정된 의료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아울러 법의 해석도 쉽지 않은 만큼 의료인이라 하더라도 골치 아픈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오늘도 이기심으로 무질서해지고 혼란스러워진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주님,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사랑으로 법을 덮을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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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내과의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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