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일이 터질 줄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날 줄은 몰랐다. 흑인들의 분노가 클 줄은 알았다. 하지만 분노의 뿌리가 그렇게 깊은 줄은 몰랐다.
미주 한인사회 최악의 시련이었던 4.29 폭동이 정확히 25년 전 일어났다.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처절하게 체험하고, 그 아픔과 설움이 제2의 유전자처럼 각인된 날이다.
1992년 4월29일, 오후 3시 지나면서 LA 전역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발단은 13개월 전인 3월3일 밤 술 취해 운전하던 흑인청년을 백인경관들이 정차시킨 사건이었다. 청년이 반항하자 경관들은 티저 건을 쏘아 그를 쓰러트리고 알루미늄 방망이로 50여 차례 무자비하게 매질했다.
소란스런 소리에 잠을 깬 인근 주민이 이를 녹화하면서 로드니 킹 사건은 전국적 이슈가 되었다. 4명의 백인경관은 기소되었지만 그뿐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백인지역인 시미밸리 법정에서 전원 백인인 배심원단은 경관들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인종차별과 불공평한 사법체제에 대한 분노, 피해의식과 좌절감으로 불만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흑인들에게 평결은 기폭제였다. 사우스센추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 순찰대는 수적으로 감당이 안 되자 즉각 물러났다. 이후 경찰은 폭동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행여 폭도들이 밀려들까봐 백인 부유층지역인 행콕팍, 베벌리힐스 일대만 철통같이 지켰다.
폭도들은 북으로 북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다. 폭도들이 떼 지어 가게들을 약탈해도 경찰은 오지 않았다. 다급한 한인들은 스스로 총을 들고 건물들을 지켜야 했다. 전쟁이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켰어도 불타거나 약탈당한 한인업소가 무려 2,800개. 4.29 폭동 전체 피해액 10억 달러 중 40%가 한인들 피해였다. 휴일도 없이 일한 피와 땀의 결실은 한줌 재로 바뀌었다. 울분과 배신감, 허탈감 속에 한인사회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미국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사우스 LA는 1965년 와츠 폭동 이후 백인들이 떠나면서 피폐하기 시작했다. 개발이나 투자가 중단돼 빈곤율이 높아지고, 거리는 갱들의 세상이 되었다. 폭력과 마약밀매가 횡행했다. 경찰은 흑인들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다. 화약고 같은 그곳으로 한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들어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즈니스 가격이 싼 곳을 찾다 보니 그곳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리커스토어를 운영했다. 리커스토어에 대한 흑인 커뮤니티의 반감을 한인업주들은 알지 못했다.
90년대 초반 설문조사에서 사우스 LA 주민들은 커뮤니티에 가장 해로운 존재로 리커스토어를 꼽았다. 폭동 나자마자 그 지역 리커스토어 200개를 불태우고 약탈한 배경이다. 그중 많은 수가 한인소유였다. 영어 서툴고 흑인문화 모르던 한인업주들에게 주민들은 대놓고 적대적이었다. 그런 그들을 업주들은 경멸했다.
폭동을 겪으며 한인사회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미국은 우리끼리만 살 수는 없는 곳이라는 사실 그리고 목소리 없으면 제대로 대접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인사회는 타 커뮤니티와의 교류를 시작하고 정치력 신장에 나섰다. 이곳에서 살려니 타인종 타민족을 이해해야 했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했다.
그렇게 25년, 이제는 우리도 이해받아야 하지 않을까. 흑인동네에 와서 돈만 벌어가는 수전노라는 해묵은 편견을 버리고 공정한 시각으로 한인들의 고통과 애환을 보는 시도가 타 커뮤니티에서도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민1세 우리가 미처 못한 일을 우리의 자녀들이 하고 있다. 폭동 당시 어린아이였던 2세들이 자라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기 배우 저스틴 전은 폭동 당시 11살이었다. 파라마운트에서 신발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며칠 후 가본 아버지의 가게는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듯 황폐했다. 폭동의 기억을 배경으로 그는 영화 ‘국(國)’을 만들었다. 영화는 지난 1월 선댄스 영화제 넥스트 부문 관객상을 수상했다.
UC 리버사이드, 한국학 연구소 연구원인 캐롤 박은 ‘캐시어의 회고록’을 펴냈다. 폭동 당시 12살이던 그는 10살 때부터 방탄유리 뒤에서 캐시어로 일했다. 1990년 아버지를 사별한 후 흑인동네에서 홀로 주유소를 운영하던 엄마를 돕기 위해서였다. 흑인 손님들이 어린 그에게 왜 그렇게 적대적이고 거친 욕설들을 퍼붓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폭동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 폭동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담은 다큐멘터리 등 2세들의 작품들이 나와 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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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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