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인이 권력을 잡으려면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따라서 모든 정치인은 지킬 수 없더라도 표가 되는 공약은 일단 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표와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공산주의 사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한 때 소련의 수상이던 흐루쇼프(과거 흐루시초프)는 “정치인은 다 똑같다. 강도 없는데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취임 100일 안 된 도널드 트럼프 케이스는 유별나다. 자신이 유세 기간 동안 수없이 외쳐왔던 주요 공약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가 하면 어떤 것은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180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사과도 없다.
“취임 첫날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겠다”던 공약은 물 건너 간 지 오래고 “모든 국민에게 싸고 질좋은 건강 보험을 들게 하겠다”던 공약도 사실상 폐기됐다. 오바마케어 대체안이 연방 하원에서 표결에도 부쳐지지 못한채 폐기되자 앞으로는 세법 개정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하다 느닷없이 지난 주에는 다시 의료 개혁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주위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본인도 어리둥절 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락가락 하는 것은 의료 개혁과 세제 개혁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대선 유세 중 ‘미국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시리아 내정에 개입하지 말 것을 버락 오바마에게 촉구했다. 그러다 갑자기 시리아가 자국민에 독개스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시리아 공군기지에 수십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로써 그가 유세 기간 내내 추켜 세우던 러시아의 푸틴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그럴 거면 시리아의 후원자인 러시아를 그동안 왜 그토록 변호해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와 함께 제2차 대전 이후 서유럽 안보의 받침목이던 나토를 보고 “용도 폐기됐다”던 트럼프가 “나토는 더 이상 용도 폐기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을 바꿨다. 쓸모없다던 나토가 왜 갑자기 쓸모가 있게 됐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트럼프 지지자를 열광시켰던 경제 공약의 반전은 더 심하다. 그는 유세 기간 중 중국이 환율을 조작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강탈해 가고 있다며 취임 첫날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고 중국 물건에 45%의 관세를 부과해 사라진 일자리를 되찾아 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취임 한 지 3개월이 다 된 지난 주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보복 관세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최악의 무역 협정”이라며 비난을 쏟아붓던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도 마찬가지다. 취임하자마자 당장 폐기할 것처럼 아우성을 치다 이제는 폐기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부분적 수정도 할까말까 망서리는 중이라고 한다. 트럼프 당선 후 폭락했던 멕시코 페소화는 지금 예전 수준을 모두 회복했다. 트럼프 협박이 허풍이라는 것을 투자가들이 눈치 챈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멕시코를 혼 내 미 중서부 러스트 벨트의 일자리를 창출해 내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공염불로 끝날 것이 확실해졌다. 다음 번 대선까지 갈 것도 없이 오는 2018년 있을 중간 선거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하다.
트럼프는 이밖에도 일부 기업들에 특혜를 준다는 이유로 폐지를 공언했던 수출입 은행은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유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미국 경제에 해를 끼치고 있다며 안 시킬 것처럼 하던 재닛 옐런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 의장도 연임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입장을 바꿨다.
더 기막힌 것은 이같은 트럼프의 입장 선회가 공약을 지키겠다고 기를 쓰는 것보다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약속대로 중국에 대대적인 관세를 부과하고 NAFTA를 폐기했더라면 그나마 미약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던 미국 경제는 무역 전쟁과 함께 새로운 불황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미국에 “컨티넨탈만한 가치도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는 말이 있다. 컨티넨탈은 미 독립 전쟁 당시 돈이 부족한 정부가 마구 발행한 불환 지폐로 휴지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졌다. 머지 않아 “트럼프 공약만한 가치도 없다”(not worth a Trump promise)는 새 속담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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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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