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행되고 있는 연방헌법은 미국인들이 채택한 첫번째 헌법이 아니다. 1775년부터 시작된 독립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던 1781년 13개 식민지들은 만장일치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승인하고 13개 주의 공동이익을 보호할 새로운 정부를 창설했다. 이와 함께 그 때까지 독립전쟁을 지휘하던 ‘대륙회의’는 ‘연합회의’로 바뀌었다.
영국 정부의 폭정에 시달려 오던 식민지 지도자들은 강한 중앙정부에 신물이 났다. 그 결과 ‘연합회의’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종이 호랑이가 됐다. 조세권도 징병권도 없이 각 주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야 했고 무슨 결정을 하려면 13개 주 2/3의 동의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능한 중앙정부에 실망하고 있는 판에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1786년 매서추세츠에서 일어난 셰이즈 반란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빚과 세금을 갚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곳곳에서 땅과 집을 차압당하고 있었다. 이 때 독립군 장교 출신 대니얼 셰이즈가 들고 일어나 4,000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이 난은 주 정부가 민병대를 조직해 간신히 진압하기는 했으나 약한 정부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고 그 결과 1787년 ‘제헌회의’가 소집돼 지금의 연방헌법이 만들어지게 됐다. 헌법 초안자들은 강한 정부를 만들되 과거 영국처럼 국민들 위에 군림하며 폭정을 일삼는 것을 막는 장치를 고안하는데 고심했다. 그 장치가 바로 권력의 분립이다. 이들은 정부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부로 나누고 가장 중요한 입법부는 다시 상원과 하원으로 나눴다.
이들은 집권 세력의 폭정만 두려워 한 것이 아니다. 서구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아테네가 어떻게 대중 선동가의 전횡으로 망했는지를 알고 있던 이들은 민중이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된 정치 지도자를 뽑는 것을 막는 방안도 연구했다. 그 중의 하나가 연방상원을 국민이 아니라 각 주 의회가 뽑도록 한 것이다. 이 방식은 1913년 국민이 상원의원을 직접 선출토록 한 수정헌법 17조가 통과될 때까지 유지됐다.
또 다른 장치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고 현명한 선거인단을 통해 선출하도록 한 것이다. 연방헌법의 주창자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임스 매디슨은 이렇게 함으로써 위험한 대중 선동가가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처럼 선거인단이 유권자의 거수기로 전락한 것은 원래 헌법 초안자들의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국민의 권익을 수호하고 집권자의 자의적인 정치를 막는 마지막 수단을 독립된 사법부에서 찾았다. “연방헌법에 관한 최고의 해설서”로 불리는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s)에서 해밀턴은 칼을 쥔 행정부와 돈을 쥔 입법부와 달리 아무 것도 없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서는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한’ 계속 직책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판사의 종신직을 주장했고 법을 해석하는 것은 판사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어떤 법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의 영역이라고 판단했다. 의회가 승인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법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위헌 심사권은 이런 이론적 뒷받침과 관례에 따라 연방대법원의 고유 권한으로 이제 확고히 자리잡았다.
안토닌 스칼리아의 죽음으로 14개월 동안 공석이 됐던 연방대법관 자리가 10일 드디어 채워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지명한 닐 고서치 판사가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를 깨는 연방상원 공화당 지도부의 핵 옵션 결과 인준을 받고 취임 선서를 한 후 대법관이 된 것이다. 이로써 연방대법원의 5대 4 보수 우위는 당분간 유지되게 됐다.
정치 사회적 이슈의 최종 결정자인데다 종신직인 연방대법관은 어떤 성향의 인물을 임명하느냐가 공화 민주 양당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 임명된 닐 고서치의 나이가 49세인 점을 감안하면 트럼프가 무덤에 들어간 지 한참 후에도 그는 미국의 앞날을 결정할 판결을 내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빈 대법관 자리를 놓고 벌인 양당의 싸움이 그토록 치열했던 이유가 짐작이 간다. 고서치가 지명자의 뜻이 아닌 헌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을 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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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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