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인 후배가 남편 이야기를 했다. 동갑인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두 아들 모두 떠난 ‘빈 둥지’에서 부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각자 아이패드를 열고 휴식시간을 갖는다. 아내는 뉴스를, 남편은 드라마를 본다.
“전에는 남편이 드라마를 안 봤어요. 내가 드라마 보다가 울면 놀렸지요. 요즘은 반대가 됐어요. 남편이 드라마 보다가 울어요.”50대 들어서면서 “남편이 이상해졌다”는 아내들이 있다. 수십년 같이 살면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전혀 딴 사람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앞의 후배는 50 갓 넘었을 때 ‘이상’을 감지했다.
그의 남편은 착하고 무던하기로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나있다. 아내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그저 너그러운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그러던 남편이 갑자기 신경질이 늘고, 고집을 부리고, 권위를 세우려 들더라고 했다. 자신이 한 말을 아내나 아이들이 바로 따르지 않으면, 무시당한 듯 화를 내곤 했다. 감정이 예민해지고 감성적이 되었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라일락 색 안방이다.
“집안 페인트를 새로 하는데 안방을 연보라색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신혼부부 방도 아니고 무슨 연보라냐?’고 해도 절대로 고집을 안 꺾더군요.”그때 조언을 해준 사람이 페인트업체 사장이었다. 그는 중년의 남성들이 핑크며 연보라 같은 색을 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남자들 갱년기 증상 중 하나이니 그냥 받아주라”고 조언했다.
‘갱년기’ 하면 여성들의 문제로 보던 인식이 바뀌고 있다. 남성들의 갱년기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남녀 갱년기의 차이라면 여성들은 폐경과 함께 증상이 확실한 반면 남성들은 호르몬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어 별 증상을 못 느끼기도 한다는 점이다.
남성호르몬은 30대에 절정을 이루다가 이후 매년 1%씩 감소해 50살 즈음 되면 결핍증상이 나타난다. 배가 나오고 머리가 빠지며 성적 무력감에 자신감·기억력·집중력·기력이 떨어지고, 불안 ·우울· 분노가 잦아진다. 아울러 체내 여성호르몬 비율이 높아져 여성화하기도 한다. 곧잘 센티멘털해지는 배경이다.
50대 초반의 회사원인 한 주부는 추진력 강하던 남편이 너무 소심해졌다고 말한다. 독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혼자 결정을 내리고 바로 행동에 옮기던 남편이 요즘은 사사건건 상의를 하려하고 이미 정한 일에 대해서도 몇 번씩 다시 확인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재정관리부터 집안 대소사까지 남편이 도맡아 처리했어요. 전형적 가장이었지요. 지금은 내게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어 해요. 불안해하고 짜증이 많아지고, 투정도 많이 부리고 무엇보다 많이 울어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다가 울곤 하지요. 감정기복이 심해진 겁니다.”게다가 가끔은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하니 남편의 이런 모습들이 그는 낯설기만 하다. 남편은 사소한 것까지 다 말하고 싶어 하고, 어디든 같이 가고 싶어 하는데, 그래서 부부 간 대화가 많아졌다고 좋아하기에는 우선 너무 피곤하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갱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60 즈음의 한 동료는 두 가지를 인정했다. 우울하다는 것 그리고 눈물이 많아졌다는 것. 가슴 찡한 기사만 봐도 눈물이 흘러서 눈가가 자주 짓무른다고 한다. 하지만 우울한 것이 반드시 갱년기 증상인지는 모르겠다고 그는 말한다. 나이에 따른 상황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동창들을 만나보면 4명 중 한명 정도 괜찮고 나머지는 이런 저런 일이 꼬여서 힘들어 합니다. 이 나이가 그렇습니다. 배우자나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자식이 뜻대로 안돼서 골치 아프고, 노부모가 위독하셔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들이 한꺼번에 겹칩니다. 이때쯤이면 직장일도 시들하고 … 삶에 기쁨이라곤 없습니다. 우울할 수밖에…”그것이 갱년기 증상이든 단순히 나이 탓이든 감정이 여려져서 툭하면 삐치고 눈물 흘리는 남편과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아내들은 자신의 갱년기 겪어내랴 갱년기 남편 비위 맞추랴 배로 힘이 든다. 앞의 주부는 말한다.
“처음에는 싸우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결될 일이 아니더군요. (남편을) 시아버지처럼 모시기도 하고 아들처럼 달래기도 하면서 살고 있어요.”성호르몬이 절정에 달하던 때 연인으로 만난 부부는 갱년기가 되면서 비슷해진다. 남편은 여성적이 되고 아내는 남성적이 되면서 서로 가장 잘 맞을 수가 있다. 그렇게 연인에서 동무가 되어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며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가는 것이 갱년기일 것 같다. 그렇게 긴 노년이 이어진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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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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