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국에서 구제역 확산으로 축산대란 우려가 심각할 때였다. 신문에 한 양돈농장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툭하면 전염병이 번져 닭이며 소, 돼지를 떼로 살처분 하는 게 축산업계의 현실이지만, 이 농장은 예외이다. 농장 운영 8년 동안 돼지가 병에 걸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전남, 해남군의 이 농장에서 사육되는 돼지는 총 3,000여 마리.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 모두가 하나같이 건강해서 전염병이 얼씬도 못하는 비결은 ‘행복’이라고 농장대표는 말했다. 돼지들을 쾌적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키웠더니 면역력이 높아져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으로 가축들이 집단으로 죽어가는 현상은 공장형 밀집축사와 상관이 있다. 경비절감을 위해 가축들을 빽빽이 가둬놓고 키우니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병에 걸리고, 한 마리가 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번지는 구도이다.
반면 앞의 농장 돼지들은 햇빛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축사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스트레스 없이 자란다. 관리비와 운영비가 엄청 많이 드는 것은 물론이다. ‘수익’이 최우선 가치인 시대에 가축들로서는 보기 드문 호사이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하게 키웠더니 돼지들이 쑥쑥 잘 자라고, 분만율 높고, 고기 품질도 좋아서 결국은 수익성이 높아지더라는 것이다. 친환경 동물복지형 사육은 성공을 거두었다. 비결은 ‘행복’이었다.
물질만능주의, 성장지상주의의 사회에서 극심한 경쟁을 달고 사는 우리도 밀집축사의 가축들과 다르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밀치고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 중심 패러다임이 이 사회를 오래 지배해왔다. 따사로운 햇살, 산들바람 맞으며 한가롭게 걸어보는 행복을 누구도 막지 않지만 누구도 쉽게 즐기지 못한다. 남보다 한 발짝이라도 먼저 올라가야 된다는 강박감이 정신적 여유를 앗아간다. 축사의 물리적 철창 대신 우리는 조급함이라는 심리적 철창에 갇혀 살고 있다. 그것은 잘 사는 것일까.
‘행복’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행복감이란 개인적 차원의 달달한 기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적 토대라는 인식이다. 행복해야 발전한다는 것이다. 유엔이 3월20일을 ‘세계 행복의 날’로 정하고 5년 전부터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하는 배경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장 중심의 정책 보다 국민의 안녕과 행복 중심의 정책을 펼칠 때 국가의 장기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는 추세이다.
2017년 보고서에서 행복 순위 1위는 노르웨이가 차지했다. 복지, 자유, 관대함, 정직성, 건강, 소득, 그리고 바른 통치 등이 행복도 결정 요인들로 측정된다. 2위~5위는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위스, 핀란드. 미국은 14위, 한국은 55위에 올랐다.
인구 500만 좀 넘는 노르웨이는 산유국이다. 원유수출 세계 4위 국가이다. 그런데 유엔의 행복 보고서 설명이 재미있다. 노르웨이는 석유 부국이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석유 부국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비결은 느림의 정책. 원유 생산을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한다. 수익금을 지금 써버리지 않고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경기가 정신없이 활황을 이루다 거품이 터져버리는 붐과 붕괴의 사이클을 겪지 않는다.
이런 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 사회의 상호 신뢰, 공동의 목표의식, 바른 통치인데 이들 요소가 행복 순위 상위권 국가들의 공통점으로 나타났다.
성장 보다 행복을 택하는 나라로는 부탄이 대표적이다. 히말라야 산속 은둔의 왕국, 부탄은 인구 75만, 국민소득 2,800달러의 작고 가난한 나라이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 대신 국민 총 행복(GNH)을 중시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도가 높다.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소득이나 복지수준이 낮은 후진국이니 유엔의 행복 보고서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정부는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전통이 깊다. 그 전통을 토대로 1972년 부탄 왕이 도입한 것이 GNH이다.
‘세계 행복의 날’로 시작된 이번 주 한국에서는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1,073일 깊은 바다 속에 잠겨있던 선체는 녹슬고 벗겨지고 갈라져 처참한 모습이다. 아무리 처참하다 한들 세월호 유가족, 특히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마음만큼 처참하지는 못할 것이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약속했던 대통령은 파면 당해 검찰 조사를 받았고, 지금 한국의 많은 국민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지난 반세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성장’ ‘성장’ 하며 달려온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성장지상주의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습관처럼 쓰고 있던 ‘성장’의 안경을 벗고 ‘행복’의 안경을 쓸 때가 된 것 같다. 행복해야 오래 갈 수가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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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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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