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년 6월 15일 영국의 존왕과 봉건 영주들은 템스강 남쪽 러니미드에서 만났다. 영주들의 동의 없이는 왕이라도 함부로 세금을 부과하지 못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합의서에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훗날 ‘마그나 카르타’로 불려지게 된 이 문서에는 왕이 이 약속을 어길 시에는 25명의 영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왕의 재산을 차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신하라도 왕이 잘못을 했을 때는 법에 따라 심판할 수 있다는 조항은 서양 사회가 ‘왕의 지배’(Rule of Rex)에서 ‘법의 지배’(Rule of Lex)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헨리 2세의 아들이었던 존은 영국 역사상 가장 못난 왕의 하나였다. 아버지 조프리로부터 앙주 일대를 물려받고 영국왕 헨리 1세의 딸인 어머니 마틸다로부터 영국을 물려받은 헨리 2세는 자기보다 11살 많은 프랑스 왕비이면서 아키텐 공국의 계승자인 엘리노어가 그에게 반해 프랑스 왕과 이혼하고 시집오는 바람에 영국은 물론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포함하는 앙주 제국을 지배하게 됐다.
부모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남겨줘도 자식이 못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존 왕은 잇단 패전으로 프랑스 영토를 거의 잃고 여기 들어간 전비를 과중한 세금으로 충당하려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그의 못남이 결과적으로 영국 사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가 유능한 왕이었더라면 왕권은 강화됐을 것이고 ‘마그나 카르타’도 없었을 것이며 이것이 국민 권익 옹호 헌장으로 발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찰스 1세도 존에 못지 않은 못난 왕이다. 그 역시 잇달아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전비를 과도한 세금으로 메우려 했으며 의회를 무시하는 정치를 하다 내란을 촉발해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도끼로 목이 날아가는 운명을 맞았다.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은 왕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왕좌를 잃는 것은 물론 목까지 날아간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법의 우위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의 목을 친 올리버 크롬웰의 공포 정치에 곧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1658년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이 아닌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모셔다 왕위에 앉혔다. 그 후 크롬웰은 부관참시되고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 위에 효수됐다 홍수가 나는 바람에 물에 떠내려 갔다 겨우 찾아 지금은 비밀리에 모처에 안장돼 있다 한다.
한국의 박근혜가 결국 청와대에서 쫓겨났다. 한번은 아버지가 살해돼 나오고 또 한번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 따라 떠나야 하는 심정은 본인 외에는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번 축출은 전적으로 본인이 자초한 것이다. 작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을 때 측근 관리를 잘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더라면 국가나 국민은 물론 개인을 위해서도 훨씬 깨끗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국회가 일정을 정해주면 거기 따라 물러나겠다’는 등 꼼수를 쓰며 미적거리다 한국 역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박근혜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엮였다”고 주장했다. 경찰과 군대, 검찰과 국정원의 최고 지휘자인 대통령을 엮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최순실밖에는 없을 것이다. 최순실에 엮인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남탓만 하는 모습이 딱하다. 하긴 존이나 찰스 1세도 끝까지 자기 잘못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박근혜 탄핵으로 한국은 무능하고 부패하며 박정희와 전두환의 인권 탄압에 무심한 낡은 보수와 결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낡은 보수 매립은 한국 사회 발전 프로젝트의 한 축에 불과하다. 한국에는 낡은 보수에 못지 않게 부정직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낡은 진보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대북 퍼주기와 북한 인권 탄압에 관한 침묵은 종교다. 수백만 촛불을 동원해 광우병 난동극으로 국제 망신을 시키고 천안함 괴담과 한미 FTA 망국론 등 허위 사실을 끝없이 유포하는가 하면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뒤에도 아무런 반성도 참회도 없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가 모두 사라진, 그런 한국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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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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