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에 <실화극장>이라는 반공 드라마가 있었다. 전봇대에 빨간색으로 쓴 ‘반공 방첩’이란 문구가 붙어있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반공 포스터(혹은‘멸공’포스터)를 그리게 하던 시절이니, 저녁 8시 골든타임에 반공 드라마를 방영한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은 기억이 안나지만,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반동분자’라는 단어이다.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공산당원들이 선량한 주인공에게 “당신은 반동분자야”라고 한 마디만 하면, 요즘말로 “게임 끝”이었다. 우리의 선량한 주인공들은 인민재판을 당해 처형되거나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반동’의 뜻을 잘 몰랐던 나는 반동죄를 무슨 엄청난 반역죄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고 반동죄가 불러오는 엄청난 비극적 결말에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 후 조금 커서였나, 반동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는데 “어떤 작용에 대해 그 반대로 작용함”이라 나와 있어 “별 것도 아니네”하면서 맥이 빠져 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반동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요즘 들어 문득문득 그 옛날 <실화극장>이 생각나는 것은 내가 그 ‘반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다. 지금 살고 있는 미국에서도, 떠나온 한국에서도 우리는 역사의 진전이 아닌 퇴행을 보고 있다.
취임 후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트럼프 행정부를 지켜보며, 지금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선거공약으로 내걸기는 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설마…” 했던 공약을 실제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을까, 아니면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흔히 백인노동자 계층의 분노가 트럼프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들을 분노케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본가들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공화당 주류는 말할 것도 없고, 서민 정당으로 자처하는 민주당조차 이들을 ‘집토끼’로 간주하고 국제화와 자동화로 설 곳을 잃어가는 이들의 처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않았다. 이들의 차오른 분노가 트럼프 정권을 탄생시켰고 그에 따른 결과는 결국 미국 국민 모두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어버이 연합’으로 대변되는 나이든 어른신들의 분노에 찬 외침을 바라보며 이들을 한겨울에 아스팔트 위로 내몬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분들은 대부분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달하던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나서 해방의 혼란과 6.25전쟁, 그리고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몸으로 관통해 온 분들이다. 월남전과 사우디 건설현장 등을 누비며 산업화 과정에서 최 일선을 담당했지만 그 열매도 자신들은 거의 누리지 못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이만큼 대한민국을 발전시켜 놓았는데, 젊은 것들은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호강에 겨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늙음을 추한 것, 기피해야 할 것으로 몰아가는 한국사회의 ‘젊음 지상주의’가 그들의 소외감과 열패감을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트럼프가 백인노동자들의 분노를 부추기며 선동했다면 한국에서는 이른바 보수 세력들이 이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사회구조나 체제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변방으로 내몬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큼 딱한 일이 또 있을까.
어느 역사에서나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시대가 있었으면 보수 반동의 시대가 뒤따랐다. 하지만 보수 반동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나는 한국 국민들이 그간의 정치적 퇴행을 끝내고 다시 자랑스런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기를 간절히 응원한다. 그리고 거리로 나선 어버이들을 ‘한심한 꼰대들’이 아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을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소외는 괴물을 키워내는 온상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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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국제 로타리클럽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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