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서프라이즈!’ 하며 소식을 전해주는 거야.”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딸이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며 잔뜩 들떠서 전화를 해왔는데, 친구는 반가움에 앞서 “아이구, 또~” 싶더라고 했다. 첫 손주 키워주고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늦가을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니 ‘제2의 육아’에 매인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육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젊은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다. 직장일 하며 아이들 키우느라 곡예 하듯 하루하루를 살았었다.
‘육아’는 그렇게 젊은 날 젊은 몸으로 통과하는 인생의 한 과정인줄 알았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 다 키워 독립시키고, 직장에서도 은퇴하고 여유롭게 노후를 즐겨보자 할 때 찾아드는 것이 있다. 아이의 아이를 키우는 제2의 육아이다.
한국의 50대 후반~ 60대 중반 여성들은 이전 세대와 좀 구분이 된다. 집안에서 아들딸 구별 없이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고, 여성들이 대학 졸업장으로 ‘좋은 남편’ 만나는 대신 커리어 추구가 보편화하기 시작한 세대이다.
70~ 80년대, 직장의 성차별은 심했다. 남성은 되고 여성은 안 되는 일들이 많고도 많았다. 채용 대상은 대부분 ‘병역필 남성’이고, 여성은 취직해도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숱한 차별로 좌절하고, 중도 포기하고, 혹은 끝까지 버티면서 이 세대 여성들이 한 가지 확고하게 한 것은 아들딸 차별 없이 키우는 것.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1등은 여학생’이라는 기현상이 이 세대 자녀들에게서 일어났다. 집집마다 “딸은 야무지게 제 할 일 잘하는 데, 아들 녀석이 …” 라는 고민을 하게 된 첫 세대가 아마도 이 세대, 우리 세대이다.
앞의 친구의 딸도 미국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똑똑하더니 현재 한국의 대표적 로펌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 딸이 육아로 발목 잡히게 할 수 없으니 친구는 둘째 손주를 또 봐주고 있다.
탄핵 정국 속에서 한국 대권주자들이 내놓는 공약이 눈길을 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연이어 발표되는 각 후보들의 정책공약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육아 정책’이다. 과거에는 거대담론들에 밀려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육아 문제가 중점 공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 공약의 공통점은 육아는 더 이상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애써야 할 주체는 엄마만이 아닌 부모, 그래서 아이를 돌보며 일할 수 있도록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유연근무제와 육아휴직을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보장하겠다는 약속들을 내놓고 있다. 30대 40대 표심을 얻으려니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사회가 그만큼 바뀌었다는 말이 된다. 능력 있는 여성들은 결혼보다 커리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둘이 벌어야 먹고 사는 시대에 부부 맞벌이는 필수가 되면서 출산은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결혼 후 바로 아이를 가질 확률은 친정집과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육아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제도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는 인식은 반가운 발전이다. 여성 대부분이 직장일 하는 사회에서 육아는 노동문제이다. “딸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서” “아들 혼자 벌어서는 먹고 살수 없으니…” “손주가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맡겨지는 게 안쓰러워서” … 노구를 이끌고 ‘제2의 육아’에 나서는 조모들 혹은 집안일 직장일 척척 다 잘하는 수퍼우먼에게만 의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국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황은 비슷하다. 대부분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만 육아의 1차 책임자는 엄마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특히 한인사회에서는 1세뿐 아니라 2세 가정에서도 엄마가 아이를 도맡아 돌보고 아빠는 옆에서 거드는 정도이다.
게다가 많은 남성들은 육아를 위해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유연근무제나 유급 출산휴가 제도가 있어도 선뜻 쓰지를 못한다. 혹시라도 부정적 인상을 남겨서 승진이나 봉급 인상에 불이익을 당할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유연성 스티그마’이다.
그러니 친정엄마나 시어머니도 가까이 없는 미국에서 한인 여성들은 수퍼우먼이 되어야 직장 일하며 아이를 키울 수가 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같이 키운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맞벌이 부부라면 맞돌봄은 기본이다. 출산과 육아를 남녀 공히 책임지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가정도 안정되고 여성의 사회적 성취도 가능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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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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