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증강은 대기업들과 Wall Street 의 배만 채워줄 것이다” 라는 평화주의자, 서부 농업인들과 진보주의자들의 비난을Wilson 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통령선거 에서 재선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진보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진보주의적 입법들도 많이 해야만 했었다.
Wilson 은 1916년의 공천대회에서 투표 없이 박수로 재공천 되었다. 그는 진보적 입법제정과 군대의 증강과 전쟁준비라는 서로 상반된 정책을 동시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세계평화주의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해 민주당의 선거구호는 “Wilson 이 미국의 참전을 막아냈다” 라는 것이었다.
Teddy Roosevelt 는 대통령 재출마를 시도했으나 그가 너무 호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 했던 공화당원들은 뉴욕주지사로써 노동, 복지 정책들을 잘 처리한 후 16여 년 동안 연방대법관을 하고 있던 Charles Evans Hughes 를 공화당 후보로 공천하였다. 1916년의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많은 국회의원 의석을 잃어서 공화당에게 대패하였으나 Wilson 은 선거인단 표수로 277 대 254 로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는데 이것은 그때까지의 대통령 선거중 두 번째로 근소한 표수 차이었다.
Wilson 은 자신의 재선은 국민들이 자기의 세계평화를 추진하려는 정책을 지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더욱 노력했다. Wilson 은 1917년 1월 22일에 “전승이 없는 평화”를 주장하였으나 독일의 Kaiser Wilhelm 은1월 31일에 독일은 무제한적 잠수함 전쟁을 계속 하겠다고 반박하였다. Wilhelm 은 이제는 독일이 영국해군을 섬멸하기에 충분한 잠수함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설혹 미국이 뒤늦게 참전하더라도 독일이 승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Wilson 은 즉각적으로 독일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강수를 썼지만 전쟁이 계속되어 미국이 결국 참전하게 되는 사태가 되지 않기를 원하였다.
그때에 독일의 외상은 주멕시코 독일대사에게 어리석은 비밀훈령을 보냈다. 만일 멕시코가 독일쪽을 도와 준다면 멕시코가 미국에서 Texas, New Mexico, Arizona 등을 되찾도록 도와 주겠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 훈령을 가로채었고 그훈령을 Wilson 에게 보내주었다.
Wilson 은 2월26일에 독일잠수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국의 상선들을 무장 하도록 하는것과 대통령에게 기타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입법해 줄 것을 국회에 요청하였다. 상선의 무장에는 별로 반대가 없었으나 선전포고 없이 해상전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사전에 부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많았다.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Wilson 은 독일외상의 비밀훈령을 공개하였다. 반독일 여론이 들끓었고 하원은 이 법안을 403 대 13 표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소수의 진보주의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상원은 대통령에게 선전포고 없는 해전을 사전에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된 이 법을 통과 시키지 않았다. 새 법의 입법을 기다릴
수가 없다고 판단한 Wilson 은 구법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상선의 무장을 감행하였다.
1917년 3월 4일에 있었던 제2기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Wilson 은 “미국은 중립을 지키되 무장은 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역사의 쳇바퀴는 쉴 새 없이 돌고 있었다. 1917년 3월 15일에 Russia 에서는 Nicholas II 황제가 공산주의 혁명으로 옥좌에서 쫓겨났고 그 다음날에 독일잠수함에 의해서 미국상선 세 척이 침몰되었고 선원 여섯 명도 사망하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이 이제는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고 Wilson 은 전쟁을 더 피해갈 방도가 없게 되었다.
1917년 4월 2일에 소집된 특별국회에서 Wilson 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의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Wilson 은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안심하고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은 약소국가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Wilson 은 열강들에게 시달려오고 있는 유럽의 군소국가들을 의중에 두고 “약소국가” 라는 표현을 썼는데 멀리 아시아에서 일본의 강점에 나라를 뺐겼던 조선사람들은 마치 미국이 조선을 도와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또 “민족자결”을 주장한 것이라고, 달콤 하게 과대 해석했었던 것 같다.
Wilson 은 미국이 정의의 십자군이 되자고 독려하였다. 미국이 영국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양대양을 울타리처럼 동서에 가지고 있어서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거대한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고 그 절약되는 예산을 교육, 공장, 도로, 철도등에 투자하여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가 있었다. 또한 영국은 유럽의 열강들이 남북미주에 새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까닭에 자연히 미국의 배타적인 'Monroe 주의'를 지켜 주게 되었다. 강력한 영국의 해군이 전 세계의 대양들을 지배하고 있으면 미국은 자유 롭게 전 세계에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미국은 자국의 국방과 무역을 위해서 영국이 패전 하면 않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참전한 후인 1918년에 연합국 측은 거의 패전해가는 상태이었다. Russia 는 소련으로 공산화가 된후 종전을 해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영국과 불란서군을 상대로 3년 반째 참호전쟁을 하고 있었다. 자동소총과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전투이었던 까닭에 그전처럼 무모한 돌격전식 전투는 더 할 수가 없었고 밤에는 참호를 파고 낮에는 숨어서 총격만하는 전투이었다. 독개스가 사용되어서 방독면을 썼어도 많은 군인들이 사망했고 “참호병” 이라는 것들이 생겼고 끝없이 떨어지는 포탄에 놀라서 “Shell Shock” 라는 정신병들이 생겼다.
영국, 불란서, 러시아 군인 400만명, 기타국들 수 백 만명이 전사하였고 미군도 참전 몇 달 동안에 50,280명이 전사하였다. 미국이 참전하기 조금 전까지 독일 잠수함들의 해상공격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연합국측은 보급품, 탄약, 자금, 병력 등이 다 모자라가는 형편으로 패전할수도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1918년5월에 독일군은 Paris 50마일 지점까지 참호를 파가며 진격 하였었고 Paris 함락과 함께 연합국 측의 항복을 받을 수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말에 미군이 참전 하면서 부터 전세가 바뀌었다. 7월에는 미군 8만5,000명이 Paris 방위에 투입되었고 8월에는 Pershing 장군 휘하의 장병 50만 명이 남부전선으로 진군하였으며 9월말 전에 미군 125만명이 참전하였다. 미국은 결정적 위기순간에 참여하여 유사이래의 최대 참극인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에 종전되는데 공헌을 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의 남자아이들이 해외에 군인으로 파병되어 전투중에 전사상할 확률이 가장 높을까? 아마 미국 남자아이들이라고 생각된다. 세계 제1차, 제2차 전쟁을 위시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세계 도처의 전쟁을 주도하거나 참여해 오고 있다. 이 모든 전쟁이 미국사람들이 생각하는것처럼 “Just War” 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국제평화에 기여한 적이 더 많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쟁을 승전할 적마다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높아져 갔고 미국의 경제는 더 활발해졌으며 지금은 미국이 세계 최강국, 최부유국이 된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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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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